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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밀한필체 Dec 29. 2019

역행


겨울은 이제 첫 발을 뗐고 올해는 이제야 피안을 넘는다.




나는 피안의 귀퉁이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팻말에 쓰인 글씨는 여기가 출구라는 건지 입구라는 건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다. 어느새 이천십구년이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당신은 이천이십년입니까. 이천십구년은 물었다. 아니오. 이천십구년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일월입니까. 아니오. 다시 이천십구년이 물었다.

그럼 일일이겠군요. 그것도 아니라오. 이천십구년은 아니오만 연발하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당신도 그런 부류군요. 그런 부류가 무엇인지 물었다.

제가 떠나는 걸 겉으로는 티 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못내 아쉬워하다가 언덕 가장자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안타까운 영혼 말입니다.

그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구나 해서 이천십구년에게 큰절을 한 번 올리고 물었다.

제게 좋은 말씀이라도 하나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천십구년은 곤란한 듯 허허 소리만 연발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

제가 걸어온 길을 한번 쭈욱 따라 걸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드릴 말씀은 그것뿐인 듯합니다.

나는 이천십구년이 걸어왔다는 그 길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길. 그 길 너머에 아주 조그마하게 보이는 빛나는 무언가.

그것은 아마도 겨울.

고맙다고 인사말이나 하려고 이천십구년을 찾았지만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언덕을 오르는 길에는 그의 것일지도 모르는 발자국만 찍혀 있었다.  나는 그가 있을법한 언덕 어딘가를 향해 또 한 번 큰절을 올렸다.



팻말을 떠나 이천십구년이 왔던 길을 거슬러 걷는다.

겨울은 팻말을 향해 걷고 나는 겨울이 지나간 길을 향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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