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오기 전 시골 선산으로 벌초를 하러 가는 일은 우리 집 남자들의 연례행사였다. 아파트로 이사하고 아버지와 목욕탕을 가지 않게 된 이후로는 유일하게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였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차를 타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차가 막히는 출퇴근 시간 전 새벽 이른 시간에 물건 납품을 직접 가시곤 했는데 나는 자주 그 길에 동행했다. 운전하는 아버지가 졸릴까 봐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사탕도 까주곤 했던 것이다. 대학생이 된 뒤로 아버지 차를 타고 장거리를 이동하는 건 1년에 한 번 성묘 가는 것이 전부였다. 선산에 가려면 꼬부랑 고갯길을 하나 넘었어야 했다. 제대하고 복학했던 첫 학기쯤 한 번은 어떤 부자가 함께 MTB를 타고 그 길을 넘는 모습을 봤다. 아들은 나이가 많아봐야 중학생 정도 될 것 같았다. 자신의 체구에 맞는 작은 MTB를 타고 아버지를 쫓아가는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 첫 번째로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은 '아, 나도 나중에 아들 나면 저렇게 하고 싶다'였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스친 두 번째 생각은 '아.. 왜 나의 아버지랑 저걸 함께 할 생각은 못했을까?'였다.
나의 아버지는 몹시 내성적인 사람이다. 맨 정신일 때는 하고 싶은 말들을 아껴두었다가 술의 힘을 빌려서만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물론 성인이 된 뒤로는 그런 과정이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맨 정신인 상태에서 술에 취한 사람의 이야기를 매번 들어주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둘 다 맨 정신이거나 둘 다 취했을 때만 대화가 성립된다. 어릴 적 나는 순종적이고 말 잘 듣는 아이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에게 맞서는 일도 많았다. 오랫동안 쌓인 감정들로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된 건 지금의 장인어른, 당시의 여자 친구 아버지를 만나면서부터다.
20대 중반, 나는 무엇보다 행복에 대한 갈증이 심했고, 그 행복의 중심에 우리 가족이 있지 못한 것에 너무 슬펐다. 그때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가족 안에서 사랑받고 자란 지금의 와이프를 만났다. 연애 초반 여자 친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면서 3일 동안 장례에 내가 함께 했는데, 함께 큰일을 겪고 나니 나는 자연스럽게 그 가족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아버님 역시 내성적인 성격에 약주를 좋아하여 우리 아버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놀라운 건 내가 나의 아버지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일이 아버님 하고는 된다는 것이었다. 상대방을 바꾸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건 나의 태도를 먼저 바꾸는 일이었다. 아니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를 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뒤로 몇 년 후 아버지와 단둘이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 삼촌들까지 아버지의 3형제 가족여행을 갔는데 한라산에 오르고 싶은 건 우리 둘 뿐이었던 것이다. 평소 등산이 취미인 아버지가 카메라 장비를 가박에 잔뜩 챙기는 나에게 "너 그렇게 짐 많아 못 따라오면 두고 갈 거야"라고 겁을 주었다. 정말 정상까지 못 따라가면 어쩌지 싶어 장비를 평소보다 대폭 줄였다. 그러나 실제 등반 중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한 건 아버지 쪽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늙었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너무 강하게 느꼈던 사람이 갑자기 약해져 보이는 것도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가 "사랑한다"라는 말을 가끔 한다. 진작부터 자주 들었으면 좋겠지만 지금이라도 해주니 감사하다. 어느새 내 나이가 마흔쯤 되니까 친구들 아버지가 하나, 둘씩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버지랑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허리가 안 좋아져 이제 다시 함께 한라산을 가거나 오래전 본 그 부자처럼 MTB를 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년쯤엔 아버지가 그렇게 가고 싶다는 스위스에 함께 꼭 가보고 싶다.
사람에게는 모두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몫이 있다. 그 몫에 너무 과분한 짐을 주어도 문제지만 너무 덜 주어도 문제다. 부모들이 자식들을 너무 과소평가하여 그 짐을 적게 주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 순간 부모가 그 짐을 대신 지어줄 수 없는 순간이 갑자기 찾아오면 아이들은 당연히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넘어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