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게이트를 만났는데 돈이 없다면

시카고, 양철 나무꾼의 심장을 찾아서.

북미 횡단 17일 차. 오늘은 시카고로 들어간다. 시애틀을 떠난 뒤로 처음 만나는 대도시다. 미국 하면 떠오르는 도시는 단연 뉴욕이다. 그 외에도 LA, 라스베이거스, 워싱턴 같은 많은 도시들이 떠오르지만 그중 어떤 도시가 미국을 대표할 수 있냐고 자문하면 쉽게 답하기 힘들다. <도시는 역사다>라는 책을 보면 시카고를 가장 미국다운 도시로 뽑았는데 그 이유를 급성장과 개척자 정신으로 들었다. 도시마다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이민자의 나라에서 미국에서 시카고는 어떤 대표할 만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차차 느껴보도록 하자.



시애틀에서부터 90번 도로를 타고 시애틀까지 왔으니 미국 전체를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는 이 도로의 3분의 2 정도를 달린 것 같다. 시카고까지 이정표의 남은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다만 문제는 톨게이트가 앞에 있다는 사인을 만났는데, 요금을 낼 현금이 없다는 것. 캐나다나 미국 대부분의 도로가 무료기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현금이 필요한 상황을 대비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톨게이트 사인을 만나 매우 당황스러웠다. 어느 정도의 현금도 없이 여행을 다니다니, 그동안 우리의 여행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뉴욕을 차로 들어가려면 터널이나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거리가 인천대교 통행 요금의 배가 넘는다. 미국과 캐나다는 아직도 많은 것들이 아날로그로 진행된다. 우리나라에선 진작 없어진 대중교통 토큰이 이곳에는 아직도 있을 정도니까. 현재로썬 톨게이트에서 카드 결제가 가능한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불필요한 리스크를 줄이고자 고속도로를 나와서 조금 우회를 하기로 했다. 시간은 좀 더 썼지만 덕분에 한적한 시카고 외각의 시골길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 여행을 경험해본 외국 친구들이 한국을 묘사할 때, 서울에서 조금만 가면 도시가 하나 있고, 조금만 더 가면 또 다른 도시가 있어 너무 놀랍다고 이야기한다. 캐나다를 횡단할 때는 5~600킬로미터는 가야 고층 빌딩이 있는 도시다운 도시를 만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인구 밀도상 건물을 높게 올릴 수밖에 없고 그런 수많은 고층빌딩이 외국인들을 놀라게 하는 것 같다. 미국 하면 떠올랐던 화려한 대도시들을 조금만 벗어나면 나머지 미국의 대부분이 이런 시골길이라는 게 새삼 놀랍다. 그렇게 한적한 길을 한 시간 정도 달리니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이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나 책에서만 보던 또 하나의 매가 시티의 실물을 영접하는 일은 늘 설렌다. 책의 내용을 조금 빌리자면 시카고는 불과 50년 만에 인구가 200배 이상 증가한 도시다. 시카고는 규모상으로 미국 제3의 도시지만 고층빌딩이 밀집한 마천루의 규모로 보면 그 위압감은 뉴욕 못지않다. 17일째 매일 여행하고 있지만 이렇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순간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 든다.



시카고의 첫인상은 "운전이 매우 거칠다"였다. 한적한 시골길만 며칠을 달리다가 오랜만에 도시에 들어와서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운전이 꽤나 거칠었다. 바쁘게 사는 사람들을 보니 정말 도시에 들어오긴 했나 보다. 규정속도 110km인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대부분의 차들이 평균 130km 정도로 달리는데, 차 간 거리를 2~3m뿐이 되지 않는다. 기차처럼 빽빽하게 줄지어 달리는 차량 중에 어느 하나라도 급정거를 하게 되면 연쇄 추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매우 위험해 보인다. 하위차선으로 옮겨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길거리에서 나스카 레이스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카고에 들어가자마자 우선 한식당을 찾았다. 여행 내내 그렇게 한식을 해 먹었지만, 왠지 누가 차려주는 집밥 먹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고 싶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식당의 간판과 메뉴판에서 시카고의 한인 이민 역사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외국의 도시에서 오랫동안 운영된 한국 식당들은 현지의 문화 안에서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잘 버무려지며 특별한 분위기가 생긴다. 지금은 꽤 규모를 자랑하는 이 식당의 사장님도 처음에는 우리와 같이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을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지금 외국에 깊게 퍼지고 있는 한류의 이미지는 그저 한 둘의 노력으로 생긴 것은 분명히 아니다. 돌로 만들어진 묵직한 불판이 올라오고 다양한 밑반찬이 그 주변에 깔린다. 적당한 두께로 썰린 선명한 색깔의 고기가 불판 위에 올려지며 "치익"하는 소리를 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려고 했다. 17일 동안 우리 정말 수고 많았다. 시끌벅적 한식당 안에서 우리는 제법 그을린 피부로 여행 중인 이방인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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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른 배를 두드리며 호텔 체크인을 했다. 어제 성황리에 마지막 캠핑을 마치고, 오늘 밤부터는 푹신한 침대에서 잔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없다. 침대에서 자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지 이번 여행에서 정말 뼈저리게 느낀다. 역시 사람은 늘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을 쉽게 잊는다. 시카고 다운타운이 한눈에 보이는 호텔을 저렴한 가격에 예약해서 더욱 기분이 좋았다. 대충 짐을 풀고 시카고 나들이에 나선다. 시카고는 이번 북미 횡단 중 우리가 만난 제일 큰 도시였다. 고작 1박 2일로 이 큰 도시를 다 둘러보기는 어차피 어려울 거 같아 이번 방문에는 마음을 비우고 발 닿는 데로 천천히 도시를 걸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흔한 가이드북도 없이 떠난 무모한 여행이지만 아무 사고 없이 이곳까지 무사히 굴러(?) 들어올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운전하고 오면서 줄리와 시카고에 대해서 아는 게 뭐가 있을까 떠올려봤다. 우리 어렸을 때는 마이클 조던 덕에 NBA팀 시카고 불스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다. 당시에는 외국 스포츠 경기를 보기가 지금보다 쉽지 않았지만 소비할 콘텐츠가 적었기 때문의 미국의 스포츠나 할리우드 영화는 친구들과의 이야기 소재에서 절대 빠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 큰 환상을 가졌었던 미국 시카고의 한 복판에 직접 운전해서 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시카고는 1871년에 대화재의 피해로 입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이 화재로 약 300여 명의 사망자와 1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완전히 불타버린 도심은 건축가들에게 하얀 젯소를 칠한 캔버스처럼 커다란 활동 무대가 되어 주었고, 이후 현대건축을 대표할 수 있는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지금은 화재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 영향으로 다른 도시들하고는 조금 다른 인상을 가지고 있다. 화재의 아픔 때문인지 도시의 곳곳에 불에 타지 않는 금속으로 마감이나 장식을 한 건물들이 많았다.



불에 타지 않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그들은 금속 장식을 선호했을까? 언듯 보면 차가운 쇳덩어리로 마감된 그 건물들이 차갑고 삭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위에 새겨진 디테일한 문양들을 자세히 바라보면 오래된 성당에 설치된 대형 파이프 오르간이 떠오른다. 시카고라는 도시가 악기라면 정말 웅장한 소리를 낼 거 같았다. 왠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심장을 갖고 싶어 하는 양철 나무꾼이 생각났다. 어떤 것도 그 외형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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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던 도시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하고 성장한다. 결핍이나 트라우마는 방어기제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시카고의 화려한 장식들이 마치 그들의 방어기제처럼 느껴져서 왠지 모를 연민이 생겼다. 이민자들이 세운 도시들은 이름이나 외형이 그들이 살던 곳과 비슷한 경우가 많다. 뉴욕만 해도 새로운 요크(New York)이라는 뜻이다. 오래된 시카고의 모습은 지금 없지만 현대적인 건물들로 도시를 재건한 시카고는 나름의 방법으로 화재의 상처를 잘 극복한 것 같다.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어디나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 시카고에서는 트랜스포머에 등장했던 마리나 시티가 제일 핫한 듯하다. 옥수수를 연상케 하는 마리나 시티의 쌍둥이 타워는 60층의 규모로 아파트와 오피스, 쇼핑, 극장, 주차장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주상복합 건물이다. 한 건물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 하여 도시 속의 도시(city within a city)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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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는 이런 고층빌딩이 많아 도시 안을 걷는 동안 쉽게 하늘을 볼 수 없었지만 이따금 빌딩 사이로 비추는 햇빛에 잠시나마 도시가 녹는 듯했다. 해 질 녘의 태양이 도시를 붉게 물들이자 마침내 심장을 손에 쥔 양철 나무꾼처럼 따뜻하고 행복한 도시처럼 느껴졌다. 그 거리를 매운 젊은이들의 활기 역시 기분 좋게 느껴졌다. 건물들이 도시의 현재를 보여준다면 젊은 친구들에게서 도시의 미래를 느낄 수 있었다.


일요일 저녁의 해가진 시카고는 급격하게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금세 상점들은 문을 닫고 인적이 드물어졌다.

이번 여행에선 대도시들과의 인연이 별로였는지 닿는 곳마다 공휴일이거나 일요일이었다. 때문에 활발한 대도시의 모습을 볼 기회는 적었지만, 인적이 없는 도시에서 한적한 분위기를 오롯이 느끼는 것 또한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정작 시카고에 사는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도시의 정막이랄까? 평일 내내 인파와 소음에 시달렸을 도시도 이 시간만큼은 오롯이 고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버킹엄 분수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연히 사진으로 본 버킹엄 분수가 시카고의 일요일 밤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다. 분수에 도착해보니 시카고의 다운타운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모두 여기와 있었나 보다. 주변을 뛰어노는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가득한 행복한 일요일 저녁의 모습이었다. 이국적인 느낌의 버킹엄 분수는 지름이 85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큰 분수 중 하나로 꼽히며, 물줄기를 46미터까지 쏘아 올린다고 한다. 특히 해질 녘의 드라마틱 하늘과 화려한 분수의 조명이 더해지면 도시의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아마도 양철 나무꾼 시카고의 따뜻한 심장은 바로 이 버킹엄 분수였나 보다. 여태까지 본 분수 중에 제일 화려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시카고가 가장 미국다운 도시인지는 내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그들의 기질을 잘 드러낸 미국의 가장 유니크한 도시라고 느껴졌다.



내일 미시간주의 작은 마을에 잠시 들릴 예정이다. 관광지는 아니지만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어쩌면 필리핀 어학연수부터 시작해 지난 캐나다 생활과 지금 북미 여행까지 약 3년간의 여정에 가장 큰 동기부여를 해주신 분이라고나 할까? 잠시 짧지만 의미 있는 만남을 하고 나이아가라와 토론토를 거쳐 몬트리올로 돌아갈 예정이다. 토론토 역시 캐나다 생활을 시작을 했던 곳이고 그곳에서 떠났던 첫 여행지가 나이아가라 폭포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는 장소이고 여행을 마무리하기 좋은 장소이다.

여행 막바지라 다가오니 벌써 아쉬움이 생긴다.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얼마나 성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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