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권 취득 후 캐나다에서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가 보통 외국에 방문하려면 방문 목적에 맞는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특히 해외에서 취업을 하고 경제활동을 하고자 하면 워크퍼밋이라고 하는 취업비자를 꼭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비자에는 제한된 기간이 있어 매번 만료 전에 연장을 해야 한다. 영주권은 쉽게 말에 외국인이 해당 국가의 국적을 소유하지 않아도 영원히 거주하며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이다.
영주권자(permanent resident)는 영주권 발급 국가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얻은 수익에 대한 세금을 해당 국가에 납부하기 때문에 의료보험과 자녀들의 교육, 실업수당까지 그 국가의 국민과 똑같은 혜택의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단 해당 국가의 국적을 가진 시민권자와 분류되는 점은 투표권이 없다는 것과 영주권 카드를 일정 기간에 한 번씩 연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 일정 수준 이상의 체류기간을 충족해야 한다.
어떤 나라의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것은 그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민 회사들은 해외 영주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영주권의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하여 설명하며 영주권 취득이 마치 로또로 얻은 '공돈'인 것처럼 홍보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뜻은 해당 국가의 국민들과 이제야 같은 출발 선상에 섰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한국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그 권리가 다른 나라에서 생긴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갑자기 한국 영주권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들이 한국 취업시장에서 일반 한국인 취준생들과 대등한 취업 시장에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언어는 물론이고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취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영주권 취득이란 골인 지점에 당도한 동시에 바로 다음 레이스가 시작되는 점이다. 그것도 현지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는 진짜 선수들과 경쟁하는 본선 경기다. 단 영주권을 취득하면 학비가 현지인 수준으로 할인되거나 학자금 대출이 쉽고, 정부지원도 쉽게 받을 수 있어 재교육과 재취업이 유리해진다.
2016년 캐나다 영주권을 최종 승인받고 그해 5월 호주에서 캐나다로 돌아왔다. 무수히 많이 떠나고 돌아왔던 캐나다의 몬트리올, 처음엔 프랑스어로 된 이정표가 매우 낯설었는데,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할 때 그 이정표를 보며 '와 집에 왔다'라고 자주 생각해서 인지 비행기 안에서 몬트리올 전경이 보였을 때 역시 '드디어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캐나다의 에드먼턴을 제외한 캐나다의 모든 도시를 가봤고 미국도 자동차로 횡단했으며 호주의 동쪽 주요 도시들도 모두 가보았다. 영주권을 취득한 다음에 다른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내가 다시 몬트리올로 돌아온 이유는 물론 이곳에 정이 들어 그런 것도 있지만, 나에게는 몬트리올이 참 살기 좋은 도시처럼 느껴졌다.
우선은 생활비가 적당하다. 이웃 토론토나 서부의 밴쿠버만 하더라도 월세나 차량 보험료 등이 너무 비싸 심한 경우 2배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한다. 도시의 규모나 밀도 역시 몬트리올이 적당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에서 내가 10년 동안 살았던 청주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국 교민이 너무 많지 않다는 것 또한 나에게는 장점으로 느껴졌다. 물론 한국 제품 구매나 서비스받기가 어렵다는 단점도 있지만 한국 교민이 너무 많아도 외국 사는 느낌이 떨어지고 한국인들끼리 경쟁도 심해서 나는 오히려 적은 편이 낫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모두 해야 하는 단점도 있지만 둘 중 하나만 잘해도 (물론 직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으며 반대로 말하면 둘 다 적당히 해도 이해를 받는 경우도 있다. 어차피 나처럼 나이가 서른이 넘어 이민을 온 경우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처럼 유창한 발음의 외국어를 구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몬트리올의 경우 영어와 불어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단일 언어만 쓰는 타 지역에 비해 언어에 대한 관용도가 넓다. 물론 불어를 못한다고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한국 교민들도 간혹 있기는 한데, 그건 소수 퀘벡콰들이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차별을 받았던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의 어른들이 일본에 느끼는 것 같은) 트라우마로 생긴 방어기제 때문이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로 차별하는 사람 중에 토종 퀘벡콰보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제3 국의 이민자인 경우도 많으니 언어로 차별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기죽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에게 언어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겨울이 길고 추운 몬트리올의 기후조건은 겨울을 좋아하는 나에게조차 조금 힘들 때가 있다. 특히 봄이 올 듯 올 듯 오지 않는 4월의 희망고문은 정말 고통스럽다.
몬트리올에 도착한 후 일주일도 안됐는데 전에 다니던 호텔에서 연락이 와서 바로 출근을 시작했다. 시차 적응을 할 틈도 없었다. 줄리도 마찬가지로 일하던 직장에서 연락이 와 둘 다 어렵지 않게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핸드폰을 개통하고 은행계좌를 다시 열고, 운전면허를 갱신하는 등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2012년 호주 여행을 시작으로 필리핀, 캐나다, 그리고 다시 호주와 베트남 여행까지 참 많이 떠돌아다닌 덕분에 이제 우리는 어디에 가던 적응력이 매우 좋았다. 특히 이번엔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사지 못했던 전자제품과 가구 등을 쇼핑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호주 생활을 해보고 난 뒤 캐나다에 돌아오니 역시 너무 좋았던 것 한 가지는 할부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지난 3년 동안 "나중에 이사 가면 사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젠 뭐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덜컥 차를 사버렸다. 호주에서는 다시 되팔기 좋은 연식과 모델의 중고차를 주로 봤는데 여기선 4천만 원 넘는 새 차를 살 수 있었다. 새 침대를 사고 소파와 식탁도 샀다. 영주권 취득 전에는 액자조차 너무 사치 같아서 사진을 스카치테이프로 벽에 붙이곤 했었는데 이번엔 액자도 마음껏 샀다. 그해 연말, 내 생애 처음으로 집에 크리스마스트리도 설치했다.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맛 본 이 안정감은 매우 달콤했다.
하지만 안정이 찾아옴과 동시에 다음 목표화 함께 변화도 필요했다. 그동안 큰 목표를 바라보며 항상 달려왔었는데 영주권 취득 후엔 그런 동기가 없으니 나 자신이 늘어난 고무줄처럼 느껴졌다. 목표가 없으니 표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늘 신기해하며 좋아했던 것들이 이젠 조금씩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직장에서도 분명하게 한계가 보였다. 처음에는 '캐나다에 온지도 얼마 안 된 나를 뭘 믿고 차를 주며 거래처를 돌라하지?'하고 생각했다. 처음엔 배울게 많다 보니 나의 노력 정도에 따라 직장 내 위치도 매우 가파르게 수직 상승했다. 그런데 영주권을 취득 이후로는 그보다 빨리 성장할 수 없음에 답답합을 느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국 나는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고 직장을 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