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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은 Feb 21. 2024

끝나는 않는 환상의 세계_<망각의 정원>

_ by 미하엘 엔데 : #망각 #판타지


소피헨(Sophiechen)은 이름에 담긴 그리스어의 의미처럼 지혜롭고 작은 소녀입니다. 그 아이는 모든 것이 획일화된 '노름' 시에서 살고 있는데, 'Norm'은 독일어로 '규격, 규범'의 뜻을 지니고 있어요. '꿈꾸는 것이 금지' 된 노름 시의 거리나 집들은 달걀판에 들어있는 달걀처럼 똑같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서로 구별이 가지 않을 만큼 닮았습니다. 그들과 집을 구분해 줄 수 있는 것은 이름과 번지수뿐이었어요.



동일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은 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상품을 사용하면서 서로 닮아 갔는데, 소피헨 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했습니다. 소피헨은 빨간 털목도리에 붉은빛이 도는 금발 머리카락을 머리 위에 동그랗게 말아 올렸고, '둥근 인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둥근 인격이란 얼굴, 자태, 두 팔과 두발, 두 눈, 특히 마음이 둥근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웃음, 슬픔, 눈물이라는 특성도 유일하게 갖고 있었지요.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런 것들이 노름 시에서는 각별한 것이었어요. 노름 시 전체가 질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로 인해 죽는 사람은 없어도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이 병은 도시 전체를 완벽할 정도로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노름 시 사람들은 서로 같아지는 이 현상을 진보적이고 자랑스러운 일로 여겼고요.



하지만 이 병은 죽음보다 더 나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의욕 상실, 무관심, 권태, 우울, 공허, 무감각, 사랑의 상실 같이 말입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도중 노름 시에서 유일하게 '꿈을 꾸는' 소피헨은 꿈을 꾸며 걷다가 복잡한 번지수를 놓쳐 타인의 집에 들어가게 돼요. 그런데 그 집의 사람들은 소피헨을 그저 달라진 외모의 가족으로 여깁니다. 소피헨도 마찬가지였고요. 뒤늦게서야 그곳이 자신의 집이 아님을 알게 된 소피헨은 다시 거리로 나서는데 우연히, 아니 운명처럼 망각의 정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후 신비로운 현관문을 통해 환상의 세계로의 모험을 떠나지요.


그곳의 신기로움은 조금 으스스한 느낌이 들게도 하는데, 소피헨은 그곳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곧바로 망각하며 계속되는 여정을 이어갑니다. 울보 감자, 광대 나비, 어린 황제, 꽃무늬 부인과의 에피소드는 미하엘 엔데만의 특유한 구성과 묘사가 빛을 발해 우리를 판타지 세상으로 푹 빠져들게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기묘한 세상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아마도 모두 완성되었다면 작품의 깊이와 철학이 그에 견줄만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동화보다는 소설로서의 완성도에 더 큰 기대감을 품게 하는 작품이었으니까요.  


이 책은 <끝없는 이야기>의 전편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구상하며 다듬어 나가다가 미완성으로 남게 된 '미하엘 엔데'의 유고작입니다. 그래서 "꽃무늬 부인은 이제 소피헨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서사가 시작될 것만 같아 짙은 아쉬움이 남기도 해요.  


아이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끝나지 않는 환상의 세상에 대한 상상과 열린 결말에 관한 무한한 생각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네요. '망각의 정원'이라니. 오롯이 현재만의 행복으로 살아가는 세상. <모모>와 <끝없는 이야기>에 이어 현대인을 향한 미하엘 엔데의 철학이 깊은 사유를 안깁니다.



"인생이란 그런 거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 거란다." (p.119)







"만약 당신이 영원히
현재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당신은 진정 행복한 사람일게요."


-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 <망각의 정원>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완성해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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