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무용함의 여백
# 무명빛
: 무명의 색깔처럼 하얀 빛.
행간의 여백에 머무를 수 있는 글을 좋아합니다. 가득 차서 담아내려 허덕이게 하지 않고, 가만히 마음에 꽃잎 하나 띄우게 하는 글. 빼곡한 감은빛의 문장보다 무명빛 여백의 쉼이 버거운 일상을 쉬어가게 해 줍니다. 때로는 그 작은 공간이 수많은 생각을 자아냅니다.
살아내다 보니 알지 못했는데 살아감도 그러합니다. 무명빛의 무용한 시간들이 나아갈 힘을 주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며 애써 나아갈 곳을 찾을 때보다 쉬어감이 되레 또 하나의 문을 열어줍니다. 알면서도 제대로 향유하지 못했습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아픈 줄도 모르다가 쉬는 날이면 몰아서 앓게 되었고, 그렇게 끙끙 대다가도 다시 월요일이 되면 어떻게든 견디어 냈습니다. 어쩌면 늘 무언가를 해야 했던 삶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읽지 않은 날에는 마음이 헛헛했고, 내 안을 떠다니는 문장들을 꺼내지 못하는 날이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효용성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와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분주했는지도 모릅니다. 경쟁하듯 높아지는 건물의 층수만큼이나 달려가야 할 목적지는 갈수록 버거워졌고, 그에 미치지 못해 하릴없이 작아지기도 했습니다.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자라서인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불안을 딛고 나아가야만 하는 이십 대를 보냈습니다.
책 읽기에 빠져 있는 사람을 돈도 되지 않는데 현실 감각을 잃고 사는 몽상가라고 여기는 이들을 보면 삶을 물질적 가치로서만 바라보는 시선에 외로움이 스며듭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추어 있는 시간들은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삶에서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순간들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쓰라린 실패와 기억하기조차 싫은 만남과 경험도 내면에는 성장의 힘으로 묵묵히 쌓이는 것이지요. 그것을 깊이 헤아릴 수 있는 혜안이 있다면, 부조리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보다 너른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따가운 햇볕과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가는 시간입니다. 모두 함께 떠나는 번잡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일상을 떠나는 것은, 새로운 한 해의 다짐이 늘어지는 햇살처럼 느슨해지며 살아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벗어나야 함이 절실한 1년의 어느 날, 휴가가 있음은 얼마나 삶에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제대로 쉬는 것은 새롭게 시작되는 일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듭니다. 지루한 생활이 산뜻해진 시선으로 보다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이지요. 하지만 휴가만을 기다리며 버티는 시간 속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일상을 비울 때 일하는 것만큼 지치는 일도 없겠지만 꼭 어딘가로 멀리 떠나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위로해 봅니다.
“우리 내면에는 언제든지 들어가서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고요한 성소가 있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내 마음의 풍경을 바꾸기 위해 모싯빛 여백의 순간들을 그려봅니다. 잘 쉬어야 잘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