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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은 Aug 07. 2024

살굿빛

_ 글 짓는 마음


# 살굿빛
 : 살구의 빛깔과 같이 연한 노란빛을 띤 분홍빛.



말보다 글이 편합니다. 말은 수많은 오해를 자아내지만, 글은 정제된 문장 속에서 마음을 오롯이 건넬 수 있게 해 주지요. 물론 그조차도 달리 해석하는 사람을 만나면 벽을 마주한 듯 외롭지만, 최선으로 담아낸 참마음이라면 그 이후의 일까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삶의 무게를 글로 덜어냅니다. 마음의 결을 따라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가다듬다 보면 내면에 켜켜이 쌓인 슬픔의 안개가 옅어집니다. 자기 인식과 성찰을 통해 보다 깊은 사유를 하게 되니 관계에 있어서도 도움이 됩니다. 글을 쓰는 동안 순화된 정서로 인해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져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살굿빛 글 짓는 마음은 두려움과 설렘, 실망과 벅참 사이를 오가며 나를 살아있게 합니다. 어쩌면 내가 세상을 이렇게 살아갔다는 흔적. 생각하고 사랑하고 걸어갔다는 것을 담아두고 싶어서 글을 쓰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 나 또한 이곳을 떠나게 됐을 때 조금은 덜 허무하도록. 비록 우주의 먼지 같은 작은 존재이지만 이곳에서 울고 웃었던 나의 여운을 잠시나마 두고 싶음은 또 하나의 부질없는 욕심일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상한 삶이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금 더 안아주고 싶은 마음에 오늘도 나는 읽고 쓰는 삶을 꿈꿉니다.  


첫 책 출간 후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을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서울의 대형 서점에서 내 책을 만난다는 달뜸은 서점에 들어선 순간 거대한 책숲에 압도되어 어지러움과 숨 막힘으로 바뀌었지요. 독자로서 갈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어요. 세상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책이 있고,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양의 새 책들이 쏟아지며 또 소리 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지, 가슴 철렁하도록 느끼게 된 것입니다.  

    

유명 작가와 이름 있는 출판사의 책들은 근사한 책 옷을 입은 채 화려한 광고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메인 매대에 스타처럼 자리하고 있는데, 그 광활한 세상 속에서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나의 책이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그래도 짧게나마 서가에 꽂혀 있지 않고 표지를 드러낸 채 누워 있음에 얼마나 감사하던지, 외로워 보이는 나의 책을 손으로 여러 번 쓸어 주었어요.    

  

책을 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첫 책 이후 일상도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어요. 책의 바닷속에서 내 작은 책은 어느새 잊혀갔고, 나는 여전히 생업 속에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찬란한 순간들은 추억의 사진이 되어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남아 있습니다. 온라인 검색 창에 나의 책 제목을 타이핑하던 순간. 서점 매대에서 처음으로 책을 만났던 두근거림. 책 속 문장으로 직접 낭독해 만든 오디오 영상을 보던 날. 한 사람만 공감해 주어도 행복할 것 같았는데 감동적인 서평을 연이어 만났을 때의 뭉클함. 이 모든 시간들을 함께 한 소중한 가족들의 응원.

        

책으로 만난 따뜻한 사람들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과 책을 통해 마음을 나누고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마지막 시간들을 나의 책이 함께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시린 고마움과 먹먹한 마음이 여전히 모자란 내게 쓸 수 있는 힘이 되어 줍니다. 멈추려 하는 나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로 인해 오늘도 누군가 나의 문장에 자신의 이야기를 포개 놓을 수 있기를 바라며 걸어갑니다. 걷다 보면 길이 됩니다. 그 길 위에서 배우고 꿈꾸고 사랑하며 살아감에 설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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