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여름에 그리는 크리스마스
# 눈빛
: 눈의 빛깔과 같은 흰빛.
기다릴 때 더욱 설레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문득 소슬한 바람을 느낄 때면 무더위가 한창인 계절 속에서도 크리스마스의 설렘으로 달뜨던 시절.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좋았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촛불을 켜고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썼던 여고생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8월의 크리스마스는 지친 여름을 잠시 쉬어가게 해 주었습니다. 불볕 세상에 찾아온 눈빛 평화. 그러다 보면 어느새 별빛으로 치장한 도시에 전주만으로도 말랑이게 하는 캐럴이 들려옵니다. 그 멜로디 사이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러 가는 길은 건반 위를 걷는 듯했어요. 주머니 사정만큼의 사람들을 어렵게 고르고, 한 사람씩 떠올리며 그의 결을 닮은 카드를 찾던 날. 고마운 사람들에게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마음 실어 보내던 날은 또 얼마나 기뻤던지요. 빨간 우체통을 뒤로하고 돌아오던 길은 한 해의 마지막 나만의 따뜻한 의식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만큼이나 첫눈 오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첫눈 약속이 있는 해에는 하늘이 조금만 잿빛이 되어도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고 또 보며 나갈 채비를 했어요. 나이 듦에 따라 각박한 생활에 치여 무감히 여겨질 때도 있지만, 아이처럼 들뜨게 하는 첫눈은 1년을 열심히 살아온 내게 자연이 주는 예기치 않은 선물입니다. 내가 있는 일상의 순간을 마법처럼 빛나게 합니다.
함박눈이 아니어도 좋아요. 잘게 내리는 가랑눈도, 성근 포슬눈도 모두 예쁩니다. 소중한 사람과 손잡고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길 걷는 것을 사랑합니다. 걷다가 뒤돌아 나란히 찍혀 있는 발자국을 바라보면 마음이 몽글해집니다. 그러다 코끝이 빨갛게 되면 창 넓은 카페로 들어가 눈빛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는 내 삶의 온도를 데웁니다. 어른의 마음도 아이처럼 설레게 하는 첫눈. 살아 갈수록 고된 생활에 치여 지나치게 되거나 되레 시린 마음을 받을 때도 있지만, 첫눈은 늘 찰나의 시간이나마 마음을 머물게 합니다.
가슴 뛰던 그 시절에는 여름 속을 걸으며 첫눈 오면 만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흩날리는 첫눈을 보며 약속한 곳으로 뛰어가던 벅차오름, 때로는 지킬 수 없는 각자의 자리에서 마음졸이는 낭만도 있었지요. 그렇게 마주한 인연과 나누던 반짝이는 웃음은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첫눈 오고 함박눈 내리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시절처럼 쿵쿵 대는 마음으로 모든 걸 제치며 달려 나가지는 못해도, 일상의 자리에서 먼 하늘 바라보며 긴 숨을 쉬어갈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여름에 꿈꾸는 것이 제맛입니다. 한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처럼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