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든든한 샘밑
# 밤빛
: 여문 밤의 겉껍데기 빛깔과 같이 검은빛을 띤 갈색빛.
# 샘밑
: 샘 솟는 근원, 영원한 창조의 근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제일 먼저 달려가고 싶은 밤이 있습니다. 어느 영화 속 주인공처럼 옷장 안에 들어가 두 눈을 감고 떠올릴 그 시간은 황망히 아빠를 놓친 밤입니다. 쉰셋. 누구보다 건강하셨기에 체기가 있다고 하신 그 밤이 마지막이 될지 몰랐습니다. 인생은 때때로 삶을 쥐고 흔들 수 있음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가혹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언제든 아빠의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습니다.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조금씩 실감 나기 시작한 아빠의 부재.
찐 옥수수의 여름 냄새는 잊히지 않는 시린 추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터울 많은 동생들은 너무 어려서 아빠는 지인들과의 여행에 초등학생인 나만 데리고 가셨던 것 같아요.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먹고 어떤 것을 보았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사진처럼 선명히 떠오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옥수수밭 한가운데서 잎을 잡고 포즈를 취하며 웃는 어린 나. 그 앞에서 흐뭇하게 사진을 찍으시던 젊은 아빠. 아빠는 그 후에도 종종 옥수수밭을 보면 가족들에게 사진을 찍자고 하셨어요. 옥수수밭이 왜 그리 좋으셨을까. 묻지도 못했는데 이제 그 기억은 나 홀로 가끔 꺼내어 보는 아릿함이 되었습니다.
깊은 새벽, 거실 베란다 문을 열고 앉아 담배를 태우시던 뒷모습도 떠오릅니다. 세상사를 모르는 마음에도 왜 그리 외롭게 느껴지던지, 인기척도 내지 않고 조용히 다시 방으로 들어갔던 나. 그런 나를 아빠는 늘 그럴만해서 그렇게 했겠지, 하는 믿음으로 바라봐 주셨습니다. 새로운 비디오가 나오거나 전자 기기를 사 오실 때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부르셨어요. 아빠와 나는 황야의 무법자 '장고' 같은 서부 영화와 중국 무술 영화를 즐겨 보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기기 사용법을 설명해 드리며 느꼈던 뿌듯함도요.
어느덧 23년. 그동안 아빠는 몇 년에 한 번씩 꿈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올해도 젊은 아빠가 눈부신 빛을 뒤로 한채 많이 힘들 텐데 네가 애쓴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이제는 좋은 일이 있을 때보다 아픈 일이 있을 때 더 생각나고, 길을 걷는 아빠 연배의 분들을 보면 아빠의 지금 모습을 상상하다 이내 고개 젓습니다. 이 생에서 이별하고 나니 좋은 기억만 마음에 돋아납니다.
엄마는 쉰에 아빠와 사별하셨습니다. 그때는 엄마의 나이가 제법 있으셨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젊으셨던 거예요. 유난히도 젊고 고우셨기에 초등학교 때 엄마가 학교에 오면 친구들이 이모가 아니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제일 예쁘다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어깨가 으쓱했어요. 엄마는 무척 세련되고 멋지면서도 매사에 꼼꼼하고 살림도 잘하며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지금의 나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을 정도였지요. 초등학교 때는 일일교사가 된 엄마가 어찌나 준비를 잘해오셨던지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셨고, 학부모총회날은 내 자리 서랍에 매번 응원의 쪽지를 남기셨어요. 도시락은 카레와 쇠고깃국, 매일 다른 국에 다채로운 반찬을 어찌나 예쁘게 싸 주셨는지 뚜껑을 열면 아이들이 감탄하며 수저를 들고 달려들 정도였습니다. 생일 때면 근사하고 맛있는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셨는데 지금도 인생 오므라이스이지요.
그 시절 아이 셋을 키우며 아들 다섯 형제 있는 집, 첫째 며느리 같은 둘째 며느리로 살아가신 엄마. 작은 아버지들 서울살이를 챙겨주시고 명절 때도 홀로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래도 불평 하나 없이 당연한 몫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삼 남매 반친구들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아들이 좋아하는 농구 선수 이름을 다 외고 룰도 배워나가셨지요.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건 엄마를 닮았네요. 엄마도 아마 자식들이 좋아하면 그저 다 좋으셨을 거예요. 요리도 집안 일도, 대학입시 때마다 종이학 천 마리씩 삼천 마리를 접으셨던 엄마를 감히 따를 수는 없지만, 드디어 닮은 것 하나 찾았습니다. 하나 더, 아기를 좋아하는 것도요.
아빠 덕분에 엄마와의 시간들을 회상해 보니 홀로 남으신 엄마가 더욱 애틋해집니다. 밤빛처럼 깊고 진한 부모님의 사랑이 내 삶에 든든한 샘밑이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쉽게 그러할 수 없음을, 너무나도 귀한 자산이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