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에서 구입한 중고책의 첫 장을 펴다가 가슴이 아릿해진 기억이 있다. 한지로 된 파스텔빛 편지지. 그 안에는 한 자 한 자 마음을 눌러 담은 듯한 필체의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여러 색상의 한지를 겹쳐 만든 편지지는 예쁘게 말린 꽃으로 장식되어 보낸 이가 얼마나 깊은 정성을 쏟았는지 느껴졌다. 한때는 사랑이었던 사람의 마음이 버려졌다. 둘 사이에 어떤 서사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린 마음이 들었다. 책을 중고로 팔 때 왜 스스로 버리지 않았을까. 알면서도 그리했다면 어느 시절의 인연을 그렇게 처분한 것이기에 잔인하게 느껴졌다. 부디 몰랐길 바라면서도 그랬다면 편지를 쓴 사람은 이미 누군가에게서 오래전에 색이 바래진 존재라는 생각에 슬퍼졌다.
책 선물을 좋아한다. 책이라는 물성 안에는 작가를 비롯한 선물하는 이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를 떠올리며 책을 골랐다고 생각하면 삶이 덜 외로워진다. 책이야 말로 그 어떤 선물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시간을 서로에게 선물해 주는 게 아닐까. 생일 선물로 책을 원해서 딸들이 선물해 준 책이 많다. 그 책들의 첫 장에서 딸들의 어린 시절을 만나면 조르르 가져가 보여주며 함께 웃는다. 서툰 맞춤법도 귀엽고 그 안에도 담긴 마음이 맑고 예뻐서 환한 웃음을 선물해 준다. 책 선물은 받을 때도 기쁘고 읽을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여 귀하다. 가만히 살펴보면 글과 함께 책을 선물해 준 사람들은 특별한 인연이었다. 그래서 책을 정리해야 할 때도 누군가의 글이 담긴 책은 다시 넣어두고,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할 상황에서는 첫 장을 따로 떼어 보관한다.
누군가에게 줄 책을 고르는 순간을 떠올려보니, 그들은 모두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책을 고르는 일은 더없이 즐겁다. 선물하는 책에는 깊이 고민하여 거르고 걸러낸 문장 하나와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그날의 날짜, 그리고 이름을 또박또박 적는다. 때로는 그 사람에게 주고 싶은 글을 찾아 옮겨 적는다. 긴 글을 남기고 싶을 때도 있지만 혹여나 책을 볼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 딱 거기까지만 한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책 선물을 받으면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열어 본다. 한 문장이어도 좋고 날짜와 이름만 있어도 좋은데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보면 못내 아쉬워진다.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마음을 건네는 일이다. 그를 위한 나의 온기가 깊다는 것이다. 용기 내어 건네는 그를 향한 수줍은 위로이다. 그런데 갈수록 책을 선물하는 것이 쉽지 않다. 책 선물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실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좋아하는 지인이나 제자에게만 책을 선물하고 있는데 그조차도 주면서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물은 책이다. 오래전에 누군가가 선물해 준 책은 그 사람과 함께 한 마음의 계절을 떠오르게 한다. 낡게 바랜 책장 속 또렷이 남은 글자에 마음이 일렁인다. 잠시나마 시간 여행을 한 듯 그 해의 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