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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ssion fruit Nov 18. 2024

예비 실업자

기분이 참 묘하다.

낙담하고 슬퍼하고 막막하고 그럴 줄로만 알았는데, 긴장의 정도는 올라갔지만 정신은 오히려 좀 더 깨어있다.

사실 발표를 기다리는 지난 몇 주간이 정말 힘들었었다. 보통 아침식사 준비는 내가 하곤 했었다. 하지만 몇 주 전부터 피곤함에 점점 늦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침식사도 아이들 학교 간식도, 스쿨버스에 데려가는 일도 아내가 다 했다. 나는 적당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 출근하곤 했는데,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새벽예배를 드리려고 맞춰놓았던 알람이 울렸다. 누운 채로 거의 자동으로 알람을 껐다. 밖에는 태풍이 지나가며 뿌려놓은 비가 아직 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심박수가 올라가며 잠이 깼다. 곧 일어나 온라인 새벽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아이들과 아내의 아침준비를 했다. 혹시라도 침대에 누워 쳐져있는 모습을 아내에게 정말로 보여주기 싫었다. 아니 그런 모습 보여주면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들 들었다.


오늘은 회사에 가지 않았다. 갈 이유도 별로 없고 가도 할게 별로 없다. 오전에 잠깐 인사부와 미팅을 하고, 몇몇 지인들과 통화를 했다. 오늘은 온전히 마음을 추스르는 하루를 갖기로 했다.


교회에 아주 가까운 지인께서(A집사님) 두 달 전쯤 직장을 잃었다. 사업체가 홍콩에서 철수하면서 현지에 사는 그 분만 남게 됐다. 지난주 한국에 면접을 보러 다녀오셨다. 이전부터 식사 한번 하려고 했었는데 타이밍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집사님, 같이 점심식사 하실래요?"


중간즈음에서 만나 식사했다. 비 내리는 날 한적한 홍콩 로컬 식당에서 마치 한국의 갈비탕 비슷한 홍콩식 소고기국밥을 먹는다.


"한국 다녀오신 건 어떠셨어요?"


면접을 봤던 얘기, 본가에서 겪었던 얘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눈다.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집사님은 발표 있으시다더니 어떻게 되셨어요?"

...

"우리 밥은 다 먹었으니까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실까요? 제가 정말 가고 싶었는데 못 간 디저트 가게가 있습니다."


홍콩 침사추이에서 북쪽으로, 조던역에서 야마테로 가는 길에 카이카이디저트라는 식당이 있다.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연달아 미쉐린 스타를 받았다. 올 때마다 줄이 길어서 엄두를 못 냈었는데, 비 내리는 평일 낮이라 줄을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상황을 나눴다. Regional office가 통째로 사라졌다. 관련된 업무는 모두 퇴사조치 되었다. 회사에서는 약 4개월의 기간을 주었다. 너무나 큰 변화였고 대규모의 인사발표였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규모가 예상보다 컸다. 


"집사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A집사님이 물었다.

 

"지금 당장은 모르겠어요. 일을 구해야겠지만, 이번주까지는 그냥 아무 생각 안 하고 쉬려고요. 몸부터 추스르려고 합니다."


맞다. 그동안 스트레스로, 평소 운동도 잘하지 않는 몸인데, 망가질 대로 많이 망가졌다. 정신적으로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경각심이 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내 멘털을 지키려면 운동부터 해서 에너지를 높여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얘기 듣고 나니 오히려 담담하더라고요. 불명확한 게 명확해졌으니, 이제 할 일이 오히려 분명해졌지요."


디저트는 정말 맛이 있었다. 미쉐린이 괜히 미쉐린이 아니다. 


"저는 앞으로 일찍 일어나서 매일 새벽예배 드리려고요. 운동도 더 하려고 하고,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준비해야지요. 그런데 무조건 적으로 아무 자리 나 막 잡고 싶지는 않아요. 직장을 다시 잡는다고 해도 비슷한 자리라면, 또 2~3년 정도의 기간 연장뿐이지 않을까요? 길어야 5년? 이제 길게 봐야 할 것 같아요. 단순히 직장이 아니라 하는 일의 의미도 더 생각해 보고 싶네요."


언제가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 유명한 유튜버이자 작가인 이동수(무빙워터)님이 한 말이다. 이제 그 시간이 나에게 왔을 뿐이다. 직장인의 끝이란, 결국은 이렇다.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회사의 결정을 그저 기다리기만 할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도록 또 다른 동물원 우리*와 같은 곳에 들어갈 것인가? 


디저트를 다 먹고도 할 얘기가 있고, 시간은 남았다. 구룡 공원을 걷는다. 비가 와 제법 운치가 있다. 이전에는 가지 않았던 구석구석까지 걸어본다. 


"실업자 둘이 미쉐린 디저트 먹고, 한낮에 공원에서 참 재밌네요."

"아, 집사님은 퇴사 안 했으니까 아직은 실업자가 아닙니다." 

"하하, 그렇네요."


그렇다. 예비 실업자가 맞다. 함께 새벽예배도 드리고, 앞으로 틈틈이 같이 운동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A집사님이 말했다.


"시간이 갈수록 감정 기복이 생각보다 큽니다. 쉽지 않더라고요."


이제 해고통보를 받은 지 고작 하루 된 내가 앞으로의 시간에 대해서 얼마나 더 알겠는가? 나에게도 충분히 다가올 수 있는 일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자. 드러눕지 말자. 이제부터 진짜 생존을 위한 게임이 시작된다. 하루하루 깨어서 살자. 


*동물원 우리: '직장'이라는 곳을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닮아 있습니다. 다른 글에서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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