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축?
마지막이 될 출장길에 올랐다. 공항 Business rounge에서 세바시, 나민애 교수님 편을 들었다. 나태주 시인의 딸로 현재 서울대 기초교육원 문학 교수이신데, 너무도 쉬운 언어 가운데 가슴을 훅 파고들어 오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사춘기 시절 한참을 붙들고 고민했던 질문이 30년이 넘은 시점에 다시 뒤통수를 때린다.
'엄마의 딸인 나는 엄마가 없어지면 없어진다.
직장인인 나는 직장에서 나오면 없어진다.
000을 버는 나는, 000을 벌지 못하면 없어진다.
그러면 진짜 나는 누구인가?'
매니저와 잠시 얘기를 나눴다. 영국인인 매니저는 옛날 얘기를 하나 해 준다. 팀원 중 한 직장에서 40년을 일한 직원이 있었다. 영업과 직원 교육을 담당했고, 40년 뒤 은퇴했다. 직급이 높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나도 빨리 그를 잊었다. 그가 없어도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했다.
"정말 빨리 잊어. 마치 그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그게 회사야."
이번 인사조치로 이곳 홍콩 사무실에서 수십 명의 직원이 한 번에 직장을 잃었다. 이 인사 조치는 Region 사장님에게는 업적일 것이다. 이 회사에서 11년을 일한 홍콩 사장님도 이번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Regional 사장님은 홍콩 사장님의 노고를 축하(Congratulation)한다면 메일을 보냈고, farewell 행사에도 참석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Congratulation? 축하라니...... 수십 명의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는데, 사장님 은퇴 축하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직원들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라며 수군댄다. 내 매니저는 한마디를 더한다.
"J, Global에 있는 사람들이 이번 조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우리랑 많이 다른 것 같아."
약, 6년 전쯤, 부서의 Operation plan을 담당할 때가 있었다. 다음 연도 예산안을 짤 때, 정말 성실하고 열심인 한 계약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을 건의했었다.
"이 직원 정규직 되면, 다음 감원 있을 때는 누가 나갈 건데? 당신이?"
나는 답을 못했다.
"숫자로 봐야 해, 숫자로. 사람으로 보지 말고."
한 때 일본에서 사축(社畜)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가축이 아닌, 회사에서 기르는 동물이라는 뜻의 사축. 사축인 직장인은 회사에 잘 길들여졌다는 뜻이다. 회사는 울타리를 제공한다. 그 울타리 안에는 규칙이 있고 정해진 일들이 있다. 그 일들을 하면 정기적으로 월급이 나온다. 월급을 꾸준히 받다 보면 어느덧 마음속에 자리 잡는 한 가지 생각이 있다.
'회사 밖은 위험해.'
드라마 미생의 명대사 중 하나인 '회사가 전쟁터라고? 회사 밖은 지옥이야'라는 말처럼, 직장인들의 생각은 알게 모르게 여기에 이른다. 퇴사 통보를 받았을 때 내가 느꼈던 마음의 충격, 그 얘기를 할 때마다 보여주는 동료와 주변인들의 반응을 보면, 나도 그들도 모두가 '회사 밖은 위험해'라는 생각을 분명히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나민애 교수님은, 우리는 내가 회사에서 없어져도 회사는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100% 동의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없어도 이 회사에도, 이 세상에도 그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사축들은 울타리 안에서 더 오래, 더 많이 먹기 위해 경쟁을 한다. 하지만 힘깨나 쓴다는 사축들도 막상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축들은 사실 울타리 밖을 동경한다. '퇴사는 지능순'이라는 표현이나 '파이어족'과 같은 단어가 말하듯 퇴사라는 단어가 최근처럼 유행하던 때가 또 있었으랴?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라는 책의 저자인 김호 대표님이, 퇴사자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대략적인 내용이 이렇다.
"회사 다닐 때 보다 시간이 많은가요?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합니다. 수입은 어떤가요?라고 물으면 수입도 줄었다고 합니다.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행복한가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이 그렇다고 합니다."
홍콩 사무실로 돌아온 첫날, 동료 C와 커피 한잔을 했다. 먼저는 한국의 비상계엄령에 대한 얘기로 시작을 했지만, 이내 구직 계획에 대해서 얘기한다. 하지만, 구직이 다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인생에 대해 얘기한다.
"내가 전 회사에서도 이런 일을 당했잖아. 그때 보니까 정말 열심히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구하더라고. 어떤 나이 많은 admin이 있었어. 모두들 그 여자한테 일자리 구하기 힘들 거라고 했지. 나이 많은 비용 높은 admin을 누가 고용하냐고. 하지만 그때마다 그 여자는 자신만만했어. 그리고 결국에는 구했어."
"어떤 회사에서 적당한 자리가 났어. 그래서 지인을 통해서 그 자리에 대해서 알아봤지. 그런데 말이야, 그다음 날, 다시 공지를 찾았는데 감쪽같이 구인 공지가 없어진 거야. Regional postion이었는데 내부적인 이유로 또 사라진 거지."
"인생은 원래 알 수 없는 건데, 회사에서 꼬박꼬박 월급 받고 잘 지낼 때는 왜 그걸 못 느꼈는지. Regional position을 구한다고 한들, 몇 년이나 갈까? 누구도 알 수 없지. 그러면 그걸 알고도 regional position을 잡아야 할까? 한 1~2년 또 연장될 뿐이야. 나는 요즘, 지금까지 해 왔던 일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어. 내 잠재력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지. 서두르지 말고 알아보려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지내려고 해."
꿈이라는 단어를 현실에 묻어두고 산지 제법 오래됐다. 그래도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꿈과 의미를 열심히 쫓았었는데, 홍콩에 와서 꿈을 묻고 의미는 잊었다. 그냥 회사에 머물렀다. 이제 자의와 관계없이 사축에서 풀려난다. 공식적인 퇴사는 아직 3개월 여가 남았지만, 퇴사 통보를 받은 시점에 이미 울타리 밖으로 내던져졌다.
'울타리 안에 있을 때 체력 좀 더 비축해 놓을 걸!'
이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지만, 늦지 않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거고, 또 닥치면 더 빨리 해 내는 거다. 요즘 나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weight training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