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거의 두 달이 넘도록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퇴사를 앞두고 동료 분들과 한 팀을 대상으로는 버크만 진단 워크숍을 진행해 드렸습니다. 또 일을 스스로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보람됐습니다.
퇴사도 해야 할 게 많아서 바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회사에서 제공해 준 핸드폰을 사용했었습니다. 퇴사 후에도 핸드폰 번호를 지키고 싶어 소유권 이전을 신청했는데 이 과정이 어찌나 길던지요. 거의 퇴사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적합한 요금제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소유권을 포기했습니다. 핸드폰 반납 2일을 남기고 급하게 아이폰 매장으로 뛰어가 기기를 구입하고 모든 데이터를 이전했습니다. 핸드폰 정보, 특히 은행, 주식, 그리고 SNS 앱들은 반드시 유지가 필요했기에 정말 급하게 우선순위로 실행했습니다.
마지막 월급날. 퇴직금과 작년 성과 보너스까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확인해 보니 저는 외국인 글로자여서 세금신고 및 납부를 다 해야 회사에서 돈을 내준다는 겁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용이 끝나면 마지막 세금을 내지 않고 출국할 것을 방지하기 위한 홍콩의 규칙이었습니다. 회사 담당자는 홍콩 법이 그러니 따라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돈을 안 주는데 어떻게 세금을 내냐?'는 질문에 다소 당황하며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저체 금액의 절반을 퇴사 2주 후에나 받았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세금신고와 납부를 끝내면 주겠다고 했습니다.
산에도 돌아다녔습니다. 홍콩에는 산이 많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가보지 않았던 동쪽 끝, 그리고 남쪽의 유명한 산. 집 앞에 산 구석구석. 한국의 산과는 또 다른 맛이 있습니다. 교회 분들과 또 더 멀리, 좋은 곳으로 가보기로 약속했습니다.
이틀 전에는 문득 집에 있다가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집 근처 산을 혼자 올랐습니다. 5시가 넘은 늦은 오후였는데, 그만 등산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멧돼지를 마주쳤습니다. 다행히 멧돼지가 저를 피해 멀리 가서 길을 계속 갈 수 있었습니다. 10분 정도 뒤, 또 등산로 밑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멧돼지가 근처에 있음을 직감하고 가까이 오지 않도록 일부러 소리를 내며 뛰었습니다. 매우 빠른 속도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힘들었었는데, 순간 fight & flight 반응이 온몸에 일어나며 뛸 수 있음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곧 시멘트로 넓게 닦인 큰 등산길로 내려와 이내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또! 멧돼지 소리가 났습니다. 살펴보니 멧돼지 몇 마리가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시멘트 길 옆은 높은 철조망으로 막혀있어 안전했습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비디오를 찍으며 따라갔는데 이런... 멧돼지가 철조망 아래 구멍을 통해 길로 쑥 올라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멧돼지 가족 4마리가 순서대로 나오며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40일 새벽기도가 끝났습니다. 40일 동안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 나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감기에 걸렸습니다. 며칠을 누워서 고생했습니다. 회사에서 보험을 적용해 주지 않기 때문에 사립 병원이 아닌 공립병원으로 갔습니다. 처음 가봤습니다. 익히 들었던 대로, 홍콩은 공립병원 시스템이 참 괜찮았습니다. 진료를 받고 가슴 엑스레이와 약 처방을 다 받았는데 180달러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립병원에 갔다면 엑스레이가 추가되는 순간 1,000달러가 넘어갈 겁니다. 다만 대기시간이 길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홍콩은 약을 강하게 처방하는 것 같습니다. 약만 먹으면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그렇게 2일 정도 지나자 어느 정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감기라는 계기로 그만 루틴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여기에 더해 불면증까지 생기며 늦게 잠들고 계속 잠을 설치게 됐습니다. 이제는 새벽기도를 가는 것이 어찌나 힘든지... 가는 날보다 안 가는 날이 더 많아져 버렸습니다.
퇴사일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 퇴사를 했기 때문에 조촐한 와인 파티가 열렸습니다. 음식을 모으고 선물도 오고 가고... 회사 회의실에서 오후 3시부터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누구도 저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퇴사일 이틀 전에는 또 몇 명의 동료들이 추가적으로 퇴사 통보를 받았습니다. 절반 이상의 직원이 순차적으로 퇴사를 앞두고 있었기에, 이런 술판이 벌어지는 상황 자체가 회사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회사에서는 퇴사자들에게 outplancement service를 제공합니다. Lee Hecht Harrison이라는 커리어 개발 회사와 연결해 3개월간 구직을 위한 코칭 및 교육을 지원해 줍니다. 오피스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어서 요즘은 이곳 오피스에 나와 코칭도 받고, 구직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제 구직을 도와주는 코치는 매 코칭이 끝날 때마다 강조합니다. 운동 계속하고, 사람들을 계속 만나라고. 하루를 구직활동으로 다 채우지 말라고. 멘탈을 잘 잡으라고 합니다.
먼저 이런 경험을 하셨던 선배님은, 이 시간을 더 값지게 쓰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고 하셨는데, 막상 또 이 상황이 되면 그렇게 맘 편하게 보낸다는 것이 막상 쉽지는 않습니다.
홍콩에는 제 경력을 살려서 할 만한 일이 많이 보이진 않습니다. 기본 생활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웬만한 수입으로는 집값과 아이들 학비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가끔씩 연락도 오고 기회들도 생기는데, 홍콩은 막막합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가장 친한 고등학교 친구. 작년 12월에 퇴직했다고 합니다. 또 오랜만에 연락한 첫 회사에서의 팀 후배님. 아주 유능하신 분인데 역시 12월에 퇴직했다고 합니다. 자의는 아니지요. 그리고 구직을 하는데 쉽지 않다고 하네요. 저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라 이게 전반적으로 지금 제 세대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위기라는 걸 직감합니다.
처음 퇴사 통보를 받던 날, 위기를 직감하며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던 것이 기억납니다. '아내에게 늦잠 자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라고 다짐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밥 차리고 운동하고 했었지요. 오늘 아침에는 아내가 소리쳤습니다
"오빠! 애들 등교 준비 좀 도와줘!!!"
피곤한 몸을 일으켜 등교 준비를 도왔습니다. 특별히 하는 것도 많지 않은데 몸은 왜 계속 피곤할까요. 저의 그 다짐은 어디로 간 걸까요? 지금의 상황도 두렵지만 정말 두려운 것은 이런 상황에 또 익숙해져 버리는 저 자신입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봅니다. 참 감정의 높낮이가 심해진 것이 퇴사 후 가장 달라진 것 같습니다. 좋을 때는 너무 좋고, 안 좋을 때는 이유 없이 또 침울해지고, 작은 일에도 많이 기뻐하고 또 많이 서운해지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많이 친절하기도 했다가 갑자기 불친절해지기도 해 이유 없이 아이들이 피해를 보곤 합니다.
인생에는 정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참 많습니다. 직접 경험한 일도 많고, 본 것도 많습니다. 어떤 분은 회사 내의 새 포지션에 면접을 보고 떨어졌는데, 일 년 뒤 그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안 간 게 오히려 득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회사를 옮겼는데 가자마자 팀 확장으로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직을 못해서 한 회사에 계속 있었는데 그 회사 제품이 대박이 나서 엄청난 보너스를 받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분사를 계기로 퇴직을 당하기도 하는 반면, 분사가 오히려 계기가 되어 승진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참 통제 밖의 일들입니다.
그렇다고 노력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고요? 같이 일해본 사람들은, 관계를 맺어본 사람들은 그 사람의 진가가 포지션이나 연봉이 아닌 사람됨과 실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실력과 관계가 좋으면 그래도 또 연락이 오고 기회도 이어집니다. 또 모르지요. 거기에서 어떤 기회들이 창출될지.
이렇게 보면 하루하루는 열심히, 미래의 일은 흐름에 맞게 살라는 말이 정말 큰 지혜로 와닿습니다. 톨스토이도 벌써 말했지요. 지금,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성경에서도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를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매일 아침 그 하루 동안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내려주십니다. 이렇게 그날 하루하루의 은혜에 감사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반면에 저는 지금에 현존하며 그 순간과 그 하루를 누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미래의 경력, 미래를 위한 재테크, 미래를 위한 아이들 교육, 안전한 노후 등등등,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 잡혀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현재에 만족하며 누리기가 사실 더 어렵긴 합니다. 하지만, 너무도 분명하게 이제야 더 깨닫게 됩니다. 지금에 감사하며 지금을 누리고 살아라. 현존하라.
원래 모든 계획은 틀어지게 되어있습니다. 틀어지면 그때 다시 세우고 또 시작하면 됩니다. 다시 다짐하고 현존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지면 또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오늘 글 분위기는 제법 가라앉아 있지만, 사실 그동안 재밌고 좋은 일들도 많았습니다. 다시 키보드를 잡아 봅니다. 하지만 이 연재는 이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예비 실업자가 아니라 실업자 이거든요.
그래도 저는 제 미래에 대해 한 가지는 압니다. 저는 5년 뒤면 이 실업의 위기를 딛고 다시 일어선 멋진 아빠가 되어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