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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플랑 Jan 12. 2019

어떤 죽음


1.어떤 죽음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80대 노인이 DOA(dead on arrival, 도착시 이미 사망)상태로 왔다. 낮시간이었고, 부부가 함께 거주한다고 했는데 환자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독거 노인이 아닌 이상은 DOA라고 할지라도 보통 수 십분 이내에 발견되어 실려 오기 마련인데 이 분은 돌아가신지 며칠이 지났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의무 기록을 남겨 놓기 위해 119대원에게 간단한 질문을 몇 개 하고 교수님을 도와 환자 정리를 마칠 때쯤 환자의 아내와 아들이 도착하였다. (보통 119 구급차로 환자가 먼저 병원에 도착하고, 뒤이어 보호자들이 온다.)
환자의 아내는 병원 문을 들어설 때부터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이고, 아이고. 찢어지는듯한 고성에 응급실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고 덩달아 잠에서 깬 몇몇 소아환자들이 함께 울음을 터뜨렸지만, 누구도 미망인을 탓하지 않았다. 그 슬픔을 공감하기에.
내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은 보호자들의 표정 변화였다. 보호자들은 엄청난 고성으로 애도를 표하였지만....얼굴은 울고 있지 않았다. 미망인은 우리가 흰 천으로 수습해 둔  환자에게 다가가 사정없이 흰 천을 걷어내고 환자의 상의를 벗겼다. 무엇을 하나 했더니.....
그녀는 환자의 배에 감겨 있던 옥돌이 박힌 허리띠(지압용으로 보이는)를 풀어 자신의 배에 감고, 강제로 웃옷을 벗겨 본인이 입었다. 거친 손으로 반지를 빼서 본인의 손에 쥐었다. 여전히 입으로는 아이고. 아이고를 외치고 있었지만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고 옥돌 허리띠가 잘 채워지지 않자 아이고를 중단한 뒤 침착하게 아들을 보며 "이것 좀 채워봐라."고 말했다. 남은 것이 없는지 목과 팔 등을 꼼꼼히 살피기도 했다. 
오 분 남짓한 애도(?)의 시간이  끝나고 며느리가 뒤이어 도착하자 미망인은 주저없이 응급실을 떠났다. 배에는 옥돌 허리띠를 감고 반지를 손에 쥔 채.



2.또 다른 죽음
  인턴이 끝나갈 즈음, 겨울날의 일이다.
치료시에 유독 협조가 안 되던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뭔가를 처치해 놓으면 스스로 다 잡아뽑는 바람에 비위관(경구로 식사를 할 수 없는 환자에게 코에서부터 위까지 관을 넣어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역시 남아나지 않았다. 환자 및 보호자(할머니)모두 귀가 어두워 처치시에 마스크를 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여 매일같이 할아버지와 씨름하였고 하루는 유독 비위관이 잘 들어가지 않아 거의 키스라도 할 기세로 가까이 가서 콧줄을 꼈다.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찝찝했지만 별 수 없었다


  다음날 할아버지의 검사 결과가 나왔고 활동성 결핵이었다. 아. 나 역시 결핵균에 노출되었으니 졸지에 여기저기 끌려가 피검사를 받고 흉부 엑스레이를 찍었다. 문제는 그 다음 날부터였다. 엉덩이 및 발꿈치, 등에 욕창이 있었던 할아버지를 소독(드레싱)하기 위해서는 30분에서 1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이건 기저귀를 가는 시간을 포함한 것이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협조가 전혀 되지 않는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위생관리를 제대로 할 리 없었고 일단 드레싱을 하려면 기저귀를 갈고 물휴지로 항문을 깨끗이 닦는 것부터 해야 했다. 할머니는 내가 할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고 옷을 갈아 입히는 동안 뒤에 서서 '아이고, 어쩌나...' 같은 말만 하셨다. 이 모든 과정을 결핵 감염을 막기 위해 두꺼운 N95마스크를 끼고 해야 하다니 당연히 드레싱이 끝나고 나면 온통 땀에 절고 악에 받친 인턴이 되는 것이다.......


 할머니의 비협조와 병식(insight, 병에 대해 아는 것)부족도 문제였다. 활동성 결핵 환자인 할아버지와 하루 종일 한 방에서 지내면서도 마스크조차 쓰지 않고 지내고, 접촉주의 균이 할아버지의 소변에서 나와 손 위생에 신경써야 하는데 할머니께서 손을 씻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렇게 손을 안 씻은 채 병실 안에서 식사를 하시기도 했다. 매 번 말씀드려도, 다음날 가면 똑같았다.


다행히 욕창은 하루 하루 나아져서 어느 금요일, 할머니와 나는 희망에 가득 차 "다 나아가네요" "참말로, 이게 좋아지네. 선생이 용하고만."같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가고 나는 다른 건물에서 당직을 섰기 때문에 이틀간 할아버지의 엉덩이를 마주할 일이 없었다. 계속 낮아지는 할아버지의 혈압과 모니터링(감지)되지않는 산소포화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나마도 다른 수많은 환자들에 묻혀 잊혀졌다.
그리고 월요일. 할아버지의 엉덩이를 본 나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온통 피칠갑이었다. 할머니도, 주치의 선생님도, 간호사도 모두 깜짝 놀랐고 협진 끝에 불려온 욕창전담간호사에게 내가 "2일전까지도 점점 낫고 있었는데요."라고 어버버거리며 말하자 욕창전담간호사는,
  "선생님. 몇시간 만에도 이렇게 안 좋아져요. 아마 겉으로 낫는 것 같아도 안에서 계속 안좋아지고 있다가 전신 상태가 안좋아지면서 이렇게 된 걸거예요. 이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어요."
라고 대답하였다. 그런것들을 미처 몰랐던 나는 그저 속상해 할 뿐, 드레싱을 열심히 해 드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할아버지는 주무시던 중 돌아가셨다. 환자가 죽으면 인턴은 환자에게 가서 '라인 정리'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몸에 가지고 있던 모든 '라인'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중심정맥관을 뽑고 그 자리를 꼬매고, 콧줄과 소변줄을 뺀다. 그 날 당직이 아니었지만, 할아버지의 라인 정리를 하러 간다는 동기 인턴의 말에 나는 따라 나섰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병실에 도착하여 동기 인턴이 라인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할머니를 열심히 눈으로 찾았다. 당연히 병실 안에 함께 계실 줄 알았는데... 그리고 이내 할머니께서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나타나셨다.

 "아이고, 다행이네, 선생님 못 보는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비닐봉지를 내게 내미셨다. 델몬트 오렌지 쥬스 세 병이 들어 있었다.

 "아니에요, 할머니, 저 안 주셔도 돼요. 그보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 어물거리는 내게 할머니는 내 손을 감싸 쥐며 말씀하셨다.

 "아니여. 꼭 받어. 덕분에 깨끗하게 갔구만. 참말로 고마웠소."

 할머니는 다시 병실로 돌아가셨다. 나도 모르게 따라 들어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옆에 서 있는데, 할머니께서 할아버지의 시신을 감싸 안고 작게 말씀하셨다.

 "욕봤소...추운데 단디 여미고 가소..."

 

 나에게는 할머니의 그 말이 어떤 말보다도 애달프게 느껴졌다. 아직도 추운 겨울날이면 할머니의 물기 어린 애도의 말이 기억난다. 할아버지께서는 단디 여미고 조심히 가셨을까. 다른 보호자 없이 두 분만 지내는 것 같았는데, 할머니께서는 이 겨울을 어떻게 여미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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