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0. 쓸모없는 선물

그토록 소중한 존재 - 아이가 보는 세상

by Luna Sea

Episode 10. 쓸모없는 선물


생일을 챙긴다는 것이 언제부턴가 생소해졌다.

출산 이후부터 나는 내 생일이 아니라 아이 생일을 기준으로 한 해를 카운트했다. 처음엔 출생 후 D-day+며칠, 몇 개월, 첫 돌이 지나고부터 두 살, 세 살 이렇게 해마다 아이는 나이를 먹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 나이를 잊어버렸다. 생일도 음력 생일을 챙기다 보니 생일이 언젠지 까먹기 일수다. 작년 이맘때쯤, 이번에도 난 내 생일을 까먹고 있었고 남편은 몰래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 몰래랄 것도 없이 케이크 불을 내가 붙이는 데도 내 생일인 줄 모르고 있었다. 내 나름 ‘폐업 축하 케이크인가?’라고 생각했다.


생일 몇 주 전, 4년간 운영한 카페를 접고 처음으로 아이와 단 둘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한창 자라는 동안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보지 못해서 미안했었다. 큰 맘먹고 14박 15일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호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동안 코로나가 판데믹이 되어버렸다. 하루 이틀 사이에 한국은 재난 국가가 되어버렸고, 돌아올 때 마스크를 잔뜩 사 오라는 주문을 받기도 했다. 일주일 만에 한국 편 비행기가 결항이 많아졌다.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도 취소되었고 부랴부랴 비행기 편에 맞춰 계획보다 일정을 앞으로 당겨야 했다. 무사히 한국에 온 우리는 자가격리 2주에 돌입했고, 집에서 열심히 쉬다 보니 날짜 감각이 사라졌다. 안 그래도 잘 잊어버리는 생일인데 여러 가지 일이 겹쳐버리니 완전 뇌리에서 아웃돼버렸다.


호주에서 남편이 부탁한 와인을 두 병 사 왔다. 나는 그 와인을 먹는 건가 싶어 와인 리스트를 말해줘도 흘려 들었다. 정작 본인은 기억 못 하는 생일을 애써 준비한 남편은 항상 서운해하면서도 이젠 그것도 9년 차가 되니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단다. 초를 켜는 날 보고는 “엄마 오늘 생일이야, 엄마는 모르지만.” 하고 아이에게 말했다. 내 생일이란 말에 아이는 자기가 더 기뻐하며 노래도 부르고 초도 자기가 껐다. 그러고 나서 부리나케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남편은 내 생일 선물로 생빈(자신이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와인을 생빈이라고 부른다)을 구해서 탄생을 기념했다. 선물로 받은 와인을 한 병쯤 비울 때 아이가 거실에 나왔다. 아이는 코에 잔뜩 힘이 들어간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생일 선물이에요!
사랑이 담긴 혼신을 다한 그림 [엄마와 나]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작품이 나왔다. 사람답게 그려줘서 고마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형체를 알아볼만한 그림을 그려온 적이 없었다. 글을 써도 알 수 없는 상형문자를 갈겨놓고 나에게 편지라고 주던 아이였다. 그래서인가 그 어떤 선물보다 기쁘고 반가웠다. 아이가 잘 크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그 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아무짝에 쓸모없을 종이 쪼가리 하나에 내 인생이 녹아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이의 엄마로 고군분투하던 몇 년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색종이에 연필로 비뚜름하게 그린 그림은 내 생에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아이나 아빠나 쓸모없지만 의미 있는 선물 고르는 재주가 있다(웃음).


조촐한 파티가 끝나고 정리를 하다가 아이방으로 들어갔다. 새로 산 책상 위에 색종이가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바닥에도 접다만 색종이들이 몇 조각 굴러다녔다. 그 조각들을 보는 나는 또 한 번 아이의 사랑을 실감했다. ‘엄마 사랑해요’ 그 한 줄을 적으려고 몇 장을 적다 지우고 새로 적기를 반복했을까. 서투른 종이 접기로 예쁘게 꾸며주고 싶은 마음이 방안 가득 꾸깃거린 색종이 더미에서 느껴졌다.




부모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그보다 더한 고귀한 것은 없다고. 아니다, 틀렸다. 아이의 사랑이야말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첫사랑이고 고귀하다. 아이가 정서적으로 독립해서 타인을 향하기 전에 처음으로 감정을 주고받는 상대는 부모일 거다. 우리에게 사랑은 처음이 아니지만 아이에게 타인을 향한 사랑은 부모가 처음이다.

가끔 뉴스에서 학대당한 아이들이 부모와 분리 처분되는 이야기를 접한다. 그 아이들은 학대로 상처 받지만 사랑의 방식이 잘못된 것을 알아도 부모를 찾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당연하다. 자신의 세상에 전부였던 부모를 버린다는 건 사랑받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처음으로 해본 사랑이니까. 그 마음을 줄 곳을 잃어버리면 아이는 얼마나 망가질까. 쉽게 말하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부모가 된다는 건 전적으로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존재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내가 희생해야 하고 나는 모든 걸 다 주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 나의 시간과 건강을 빼앗아 갔고 그 대신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줬다. 아이는 매 순간 나의 한계를 시험했고, 나의 심연의 바닥을 보게 했다. 육아를 하면서 전에 없던 감정을 느껴봤고, 하지 않았을 행동도 하게 됐다. 내가 이 아이를 키운 노력에 반의 반만 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존재는 나의 시선이 얼마나 편협하고 내면으로 향해 있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많은 것을 잃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 아이에게 감사한다. 그가 나의 아이로 태어나서, 그리고 그토록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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