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소중한 존재-아이가 보는 세상
7. 달님이 지켜주는 아이
우리 집은 거실 창 밖 풍경이 괜찮은 편이다.
특히 보름달이 뜰 때가 베스트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무렵 빌라 전세를 벗어나 자가로 이사했다. 큰 평수는 아니지만 지하철이 지척이고 건물 앞에 가리는 것 없이 오후 늦게 까지 해가 드는 남서향 중층 아파트였다. 이사한 첫날밤, 청소도 대충 남아있고 가구가 겨우 자리를 잡은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아 밖을 보았다. 달빛이 눈에 차올랐다. 안 방에 있는 아이에게 뛰어가 '달이야 달!' 하고 기쁨을 전했다. 아차, 그는 벌써 안방 창가에 붙어 앉아 있다.
“엄마, 달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해.”
구름이 달을 지날 때 흐려지는 달빛을 신기해했다. 인생 처음 ‘달무리’라는 것을 본 아이는 넋을 놓고 한 시간 가까이 창가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 머리 위로 휘영청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달님, 아이가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잘 보살펴 주세요.’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가장 힘들 때는 아이가 아플 때다. 우리 아이는 네 살이 되던 해에 한 해에 세 번이나 폐렴에 걸렸다. 한 번 입원할 때마다 2주는 기본으로 입원을 했고 여차하면 한 달 넘게 병원에서 살아야 했다. 평소라면 일하는 동안 시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셔서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아플 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잠이 와도 졸린 눈을 억지로 떠가며 안간힘을 쓰는 껌딱지였고, 아프면 그 껌딱지 증상이 한 층 더 심해졌다. 병원에서 약물 치료를 위해 흡입기를 코와 입에 대야 하는데 악을 쓰고 하지 않았다. 엄마가 와서 어르고 달래야 겨우 하는 정도라 일하는 중에도 수시로 전화가 와서 “더는 못하겠다, 어서 와라.”는 어머님께, “최대한 일찍 갈게요”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일을 마치고 교대하러 헐레벌떡 병원으로 가면 어머님은 하루 종일 어리광을 받아주시느라 녹초가 되어있었다. 그런 아이를 안고 지친 나도 아이도 좁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잠들만하면 간호사 이모들은 열을 재러 들어왔다. 선잠이 들어 자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몇 주 지나 퇴원을 하면 이젠 괜찮겠지 했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또 폐렴에 걸렸다. 입원을 안 할 땐 수시로 이비인후과를 들락거렸다. 그 해 여름 세 번째 입원을 할 때,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이사할 곳의 조건은 첫째로 공기 좋은 곳. 둘째로 학교가 가까운 곳. 셋째로 지하철이 가까운 곳(어머님이 봐주시러 와야 했으니까). 우리가 가진 능력치 안에서 이사할 곳은 마땅치 않았고 집을 알아보는데만 6개월이 걸렸다. 주말마다 후보지 부동산을 돌아보았다. 산만디 공기 좋은 빌라는 너무 평수가 커서 금액이 너무 올라갔고 교통도 불편하며, 인테리어 공사에도 만만찮은 돈이 들어갔다. 평지면서 저렴한 아파트는 너무 낡고 마찬가지로 인테리어를 무조건 다시 해야 했다. 게다가 그 당시 남편은 대출이라면 치를 떨었고, 대출은 최대한 안 하려 했다. 결국 내가 처음 찍어 둔 대단지 아파트는 거의 다 제외되었다.
자가로 이사 가려고 전셋집 근처에 들어올 아파트를 분양받아 두었지만, 입주는 2년 반을 더 기다려야 했고 그전에 우리가 지쳐 죽을 것 같았다. 우선 이사를 가야만 했다. 아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으로 수시로 입원을 하는데, 주변엔 소형단지부터 대단지까지 아파트 공사가 줄줄이 있었다. 온 동네가 늘 공사 중이라 하얀 공사 분진이 말도 못 했다. 그것이 폐렴의 주원인이라 생각한 우리는 단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 했다.
무더운 8월부터 집을 보기 시작해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서야 이사 갈 집을 정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여기 아니면 우리 기준에 맞는 곳은 없다고 남편을 데리고 지금의 우리 동네로 왔다. 초중고가 걸어서 10분 거리 안에 있었고(고등학교는 고바위긴 했지만 초중이 가까워서 오케이 했다), 어린이 집과 유치원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여러 개 있었다. 산이 대로변 양쪽으로 늘어선 데다 산을 하나 넘으면 저수지도 있어 공기 하난 끝내줬다. 주거형 오피스텔이라 엄연히 주택이 아니지만 4 Bay로 아파트 평면도와 같은 구조였다. 이른바 주거형 오피스텔이다. 취득세가 일반 주택에 비해 높은 거 말곤 아파트와 거의 같았다. 가격부터 위치 등등 다 마음에 들었다. 단지, 우리 둘 다 직장에선 더 멀어졌다. 그뿐이다. 일을 마치고 오후 8시쯤 집을 보았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음을 정했다. 됐어, 여기야. 창 밖으로 길 건너 학교와 동네가 내려다 보이고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늘어져 있어 더할 나위 없었다. 부동산 아주머니는 다른 호실 동향을 추천하셨지만, 그 당시 살던 전셋집이 동향이라 거절했다. 나는 뜨는 해 보다는 지는 해가 더 좋았다.
아이는 이 곳으로 이사 온 후 두 달 남짓 가을께 한 번 더 병원신세를 졌다. 그날 밤도 달이 크게 뜬 보름이었다. 감기가 걸려 거실에 이불을 둘둘 말고 티비를 보던 아이가 구토를 하더랬다.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을 가는 몇 걸음 사이에 몸이 뻣뻣해지더니 갑자기 눈을 뒤집고 쓰러졌다.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119를 불렀다. 응급실 의사 선생님은 아이가 쓰러질 때 눈동자가 어느 쪽으로 굴러갔는지 물어보셨다. 폐렴균이 뇌에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했다. 3주를 입원했다. 겉으로 보이는 이상은 없으나 혹시 모르는 뇌손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폐렴 증세는 일찍이 없어졌지만, 뇌에 이상이 없어 보인다는 진단을 받고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단순히 공기가 좋아서 인지, 아이의 면역력이 좋아져서 인지 그 후로 잔병치레 한 번 없이 잘 크고 있다. 그날 밤 응급실에 아이를 눕혀놓고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지 모르겠다. 119 엠뷸런스를 타고 가는 길 내내 불안해하며 따라오던 보름달이 어쩌면 내 소원을 들어주었나 보다.
나는 우리 집의 야경에 마음을 뺏겼고, 아들은 손에 잡힐 듯 떠있는 달님에게 마음을 뺏겼다. 지금도 보름이 되면 아이는 창가에 앉아 달님과 이야기한다. 가끔 노래를 부를 때도 있다. 다른 어느 곳이든 집 값이 널뛰며 오르는데 우리 집값은 4년째 전혀 오르지 않아도 나는 우리 집이 좋다.
달님이 우리 가족을 보살펴 주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