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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달 Aug 23. 2021

무서워서

82년생 김지영과 아이를 찾습니다

아이의 엑스레이 결과를 보러 병원 재활의학과에 다녀오는 길에 근처에 있다는 동네서점에 들렀다. '미스터 버티고'라는 요즈음 동네서점에 딱 어울릴만한 이름을 가진 곳이다. 서점 주인의 짧은 감상평을 띠지로 둘러서 책을 설명해주어 책 선택에 도움을 준다.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점&카페이다. 내가 로또를 맞는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을 때 꿈꾸었던 그림 중에 하나가 이런 서점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임대료 걱정없이 내 건물에서 동네서점을 열어 주민들의 커뮤니케이션 장소로도 사용하고 젊은 사람들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서점은 북카페가 아니기 때문에 책을 사야 앉아서 읽을 수 있다. 사고 싶은 책 1권은 정해져있었다. 최근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유시민의 '나의 현대한국사'. 객관적이지 않은 유시민이라는 인간의 주관적인 현대사는 필자의 유려한 글솜씨로 술술 읽혔고 격동의 시기를 지나며 벌어진 마치 소설같은 실제 상황들이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눈물을 불러왔다.


그러나 난 그 서점에서 1시간이라도 보내고 싶었다. 약한 비가 가신 날씨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싶었다. 새로운 책을 고르려고 주인의 추천도서들을 훓어보았다. 나온지 좀 되었지만 아직도 핫한 '82년생 김지영'. 80년생 여자인 나의 이야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책을 들어 몇몇 대목들 후루룩 넘기는데... 너무나 무서웠다. 80년생 여자인 나의 이야기. 배운 여자로서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키우면서 겪어온 수많은 불편함과 억울함들이 살짝 들춰본 페이지에만 해도 가득했다. 무서워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읽고 나면 마음이 너무 안좋을 것 같았다. 나의 현실을 내가 읽는다는 것이, 그냥 다 그런거야 하며 버티는 삶을 적나라하게 본다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그냥 김영하의 '오직 두사람'을 골랐다. 종편 TVN의 '알쓸신잡'에서 만난 잡다하고 깊게 많이 아는 소설가. 그동안 그의 이름과 작품들은 쏠쏠찮게 들어왔지만 읽어보지는 않았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고전소설을 좋아한다. 현대소설은 현실을 반영하기에 판타지로 읽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면 나는 소설이라는 문학작품에서 현실을 그대로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대인들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현대소설을 읽고 싶다.


'오직 두사람'은 단편을 묶은 책인데 두번째 이야기를 읽고는 또 무서워져 버렸다. 향과 맛이 풍부한 커피와 아마도 프랑스 방송인 듯한 라디오 소리를 배경으로, 여행지에 온 듯한 기분으로 책을 읽다가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오면서 집에 가고 싶어졌다.

 '아이를 찾습니다' 두돌배기 아이를 잃어버렸다가 십수년 후 다시 찾은 남자의 이야기. 이야기 자체보다도 그 소재가 아이를 가지게 된 나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아이. 아이를 잃는다면 인생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아이라는 생명체의 신비함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 삶의 느낌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보다 덜 행복했음은 분명하다.



가고 싶던 서점에서 보고 싶던 책을 보았지만 두려웠다. 아이 덕분에 행복하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삶의 현실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잃으면 안 될 것이 생겨버린 나는 진정한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두려워서... 종종걸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스스로 구속당하기 위해서. 잠깐의 햇살같은 자유를 버리고 답답하지만 따뜻한 온기를 안을 수 있는 스윗홈으로.


_ 2017.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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