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온 세상이 도로 겨울왕국으로 변해있었습니다. 몸은 점점 노인의 몸으로 바뀌어 가고 있을지라도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만은 여전히 소년입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전철 타고 갈 거지?”
“차는 못 끌고 가겠다. 전철 타고 가서 모임 끝나면 교보문고나 들렀다 오자.”
오늘은 선교회 모임이 있는 날이라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해야 합니다. 전철역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헐레벌떡 서울 가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우리 집에서 전철 타고 불과 삼사십 분 거리밖에 되지 않지만 지금 내게 서울은 엄연히 타향(?)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라나 서울밖에 모르고 살았던 서울 토박이가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기 시작한 지 벌써 삼십여 년 긴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한평생이 꿈을 꾼 것처럼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내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살 수 있을까? 서울로 돌아온다 해도 이전같이 살 수 있을까? 덜컹덜컹 달리는 전철에 몸을 내맡긴 채 이 생각 저 생각하는 사이 벌써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지하철역에서 올라오자 서울거리는 벌써 눈이 다 녹아 길바닥이 질척거리고 있었습니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 조심조심 땅만 보고 걸어가는데 아내가 내 팔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여보. 저기 남산 좀 봐.”
남산에 눈이 하얗게 덮여있었습니다.
“와. 남산도 멋있네.”
눈 덮인 남산 풍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젊은 날의 추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
우리 부부가 한창 연애하던 1980년도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아내와 남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둘 다 한껏 멋을 부리고 나왔습니다.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어도 그날 우리들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아내는 눈에 확 띄는 짙은 보라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나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펄럭이며 걷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해 첫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야! 눈이다!”
데이트하다 첫눈을 만나니 행복했습니다. 두 연인이 함박눈을 펑펑 맞으며 마치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산 길을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그런데 탐스러운 함박눈이 점점 폭설로 변해가면서 매섭고 세찬 바람까지 불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눈길 한복판에서 아내가 달달 떨고 있었습니다. 금세 입술이 새파랗게 변했습니다.
얼른 바바리코트를 벗어 아내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습니다. 빨리 추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쪽 길 건너편에 빵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빵집 이름도 보였습니다.
“솔로몬제과”
눈보라가 사납게 휘몰아치며 우리의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습니다. 살을 베이는 것 같은 칼바람이었습니다. 바바리코트로 아내를 감싸 안고 길 건너 빵집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웬 덩치 큰 털보 아저씨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빵집 주인이었는데 우리를 맞이하는 그 동작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혹시 우리를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빵집 한복판에 난로가 후끈후끈 달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주인아저씨가 얼른 우리를 난로 옆자리에 앉혔습니다. 아직 빵집 안에 우리 말고 다른 손님은 없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쟁반에 빵과 우유를 들고 다가왔습니다.
“아저씨도 앉으세요. 추운데.”
“같이 앉아도 될까요? 고마워요.”
세 사람이 옹기종기 난로 곁에 둘러앉아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주인아저씨가 말을 건넸습니다.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유리창 밖으로 길 건너편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자 키 커다란 청년이 얼른 외투를 벗어 연인의 어깨에 덮어주는 그 모습이 어찌나 멋지게 보이던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고 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연인들이다. 저 두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우두커니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두 사람이 길 건너로 뛰어오더니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너무 신기하고 반가웠다고 합니다.
마음 따뜻한 주인아저씨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날 무슨 대화들을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아저씨가 우리를 위해 틀어준 음악만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 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한 것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노래 가사가 너무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는데 아내가 물었습니다.
“찬민 씨. 이 노래 가사가 어디서 나온 건 줄 알아?”
“…아니. 몰라.”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야.”
나는 그때까지 교회라는 곳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노래 가사가 성경 구절인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인아저씨도 웃으며 거들었습니다.
“맞아요. 성경에 고린도서란 책이 있는데 거기 나오는 말씀이에요. 두 분이 좋아하실 것 같아 틀어드렸어요.”
“어머나. 아저씨도 교회 나가세요?”
“네. 손님도 교회 다니시는 모양이죠?”
그때부터 두 사람이 갑자기 친해졌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던 것처럼 어쩌고저쩌고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교회 이야기 성경 이야기들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 댔습니다.
빵집을 나올 때 주인아저씨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턴 두 분 같이 교회 다니세요.”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네. 이 사람도 교회 다니게 될 거예요. 제가 꼭 데리고 나갈게요.”
아내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교회? 우리 집은 불교 믿는 집안이라 앞으로도 내가 기독교 믿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특히 나는 교회 다니는 인간들은 진짜 아주 밥맛이거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새삼 아내를 바라보았습니다.
어? 그런데 이 여자도 교회 다니잖아…
나는 지금 목회 은퇴하고 은퇴한 목사님들만 함께 모여 예배하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작년 성탄 예배 때는 우리 부부가 특별 찬양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찬송가를 부를까?”
아내가 조금 생각하더니…
“그 찬송 어때?”
“무슨 찬송?”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아. 그 찬송 좋겠다. 우리 그걸로 하자.”
성탄절 예배 때 우리 부부는 젊은 날을 추억하며 남산길 빵집에서 처음 들었던 그 아름다운 찬양을 불렀습니다. 찬양을 부르며 나 홀로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습니다.
아.
그때만 해도 진짜 교회 다니게 될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이렇게 목사까지 될 줄은 더더욱 몰랐었네.
***
“여보. 우리 모임 끝나면 교보문고 가지 말고 남산 갈까?”
“남산? 남산은 갑자기 왜?”
“응. 그 빵집이 생각나서…”
“빵집?”
“솔로몬제과”
“………”
이제 그 자리에 빵집은 없습니다. 강물처럼 흘러가 버린 세월 속에 빵집도 사라지고 턱수염 기른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도 사라지고 장발에 바바리코트 자락 펄럭이던 키 큰 청년도 사라지고 짙은 보라색 코트에 분홍빛 머플러 펄럭이던 긴 머리 소녀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다 사라져도 추억만은 그때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노년의 부부가 된 우리 모습도 추억 속에서는 언제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멋지고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