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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생 팀장 실패기: 자기 자랑은 나중에

by 삼색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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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8년생 팀장 실패기의 시작 2. 책상 밑 내팽개쳐진 슬리퍼 3. 내가 이간질했대 4. 같이 욕하면 내편 돼줄 줄...5. 식물하고 대화해 본 적 있나요


이 글은 팀장으로서 겪은 실패들을 바탕으로, 그 경험에서 얻은 배움을 회고하는 이야기다.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병렬적으로 풀어낼 예정이다.


주의:이 글은 88년생 팀장으로서 나의 실패 경험과 배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일부 사건은 각색되었습니다.




회사의 자리도, 직함도 사실은 다 빌려 쓰는 것일 뿐인데

새로운 직장에 팀장으로 취업을 했다. 업무면에서나, 조직 내 입지로나 자리를 잡기도 전에, 몇백 장의 명함이 먼저 제작되었다. 빳빳한 종이에 적힌 두 글자 '팀장'을 보면서 내심 기뻤다. '나도 이 명함을 들고 다니며, 멋지고 세련스럽게 일 잘하는 팀장이 될 거야!'

이렇게 단 몇백 장의 명함에 희망을 담았다. 그리고 설렘과 동시에, 어서 내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스멀스멀 번져 나왔다.


내 책상, 내 자리, 내 명함...

이 작은 소유물들은 인정욕구와 소속감에 목마른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매일 출근길마다 내가 좋아하는 문구류, 티 나지 않는 장식품들로 자리를 꾸며나갔다. 어느 날은 생전 사본적 없는 브랜드 무선키보드와 마우스를 장만해서 '나는 좀 남다르지'라는 생각에 쫀득한 타건감을 즐기며 일을 했다.

이렇게 자리 파티션을 넘칠 듯 말 듯 은밀한 즐거움은 한동안 지속됐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책상도 자리도 결국은 '빌려 쓰는 것'에 불과하고, 명함 또한 지금 것 다닌 직장들에서 한 번도 다 쓰고 나온 적이 없다.

그리고 직장생활에선 주인의식을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겸허한 태도를 지닌 손님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손님이 오성급 호텔에서 하룻밤 머물며 허세를 부릴 수 있어도, 그 호텔이 내 소유가 아니라는 현실 감각은 분명하듯 말이다.


그걸 몰랐던 나는,

첫 팀장 직함이 순식간에 내게 특별함을 안겨준 것처럼 느껴졌던 그때, 그 빛나는 후광에 눈이 부신 나머지 나 역시 스쳐가는 손님이었음을 망각하게 됐다.




자기 자랑은 나중에

그래도 내가 팀장으로 바로 이직을 할 수 있었던 나의 능력이나 경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 오기 전 20대 내내 몸담았던 조직은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며, 한정된 예산 속에서도 최대의 성과를 내기 위해 애썼던 곳이었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도 내 최고의 자부심이자, 나를 성장시킨 소중한 자산이다.


이후 새로운 조직에 발을 들여놓자, 예전 성공을 빛냈던 방식들을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누가 물어보거나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문서 스타일부터 각종 서식을 바꾸며 신나게 변화를 주도했던 내 모습은, 당시에는 자신감의 발현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교만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 일명 거래처를 뚫을 때에도, 내가 알던 사람, 전에 같이 일했던 곳을 거미줄처럼 끌어다 왔다. 물론 그들이 거래를 해준 것에는 나와의 관계 때문도 있었겠지만, 겉으로 봤을 때 건실했던 기관이라 그들에게도 손해 볼 것 없었던 것이 더 컸을 것이다. 이것 역시 내가 빌려 쓰고 있던 직함의 후광효과였을 수도 있는데, 그때만큼은 내 맨파워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게 컸다.


다시 돌이켜 보면,
잘하고 싶고, 좋은 성과를 보이고 싶은 내 마음이나 입사 초기 열정은 옳았다. 침체된 회사 분위기에 소소한 활력을 불어넣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내가 놓친 것이 있음은 틀림없다.


이미 경고등이 켜진 지난 회사에서, 나 혼자 들떠 있는 모습은 팀원들에게 혼란과 부담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균열이 더 커지지 않도록 각자의 몫을 다하며 조직을 안정시켜 나가야 했는데, 나의 지나친 열정과 자기 자랑은 오히려 그 균열에 더 큰 하중을 더한 건 아니었을까?



다짐과 회고


사회심리학에는 '초두효과'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첫 만남에서 보여준 모습이나 말투, 태도가 이후 그 사람의 인상 평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첫인상을 형성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잘하는가 보다 미소, 눈 맞춤, 배려심 있고 협력적인 태도와 같은 친화적인 신호로 먼저 그 사람을 평가한다고 한다. 결국, 친화적인 이미지가 자리 잡은 후에야 비로소 업무 능력이나 전문성이 드러나는 법이다.


맞는 말이다.

나는 이걸 몸소 부딪혀가며 뼈아프게 배웠는데 이렇게 간결하게 글로 적어지니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팀장 교실’ 같은 프로그램을 열어, 따끈따끈한 팀장들이 새 명함과 사원증을 받고 나면 먼저 해야 할 친사회적인 협력의 가치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팀장이 되었지만 사람도, 일도 파악이 안 돼 뚝딱이처럼 앉아 있는 당신에게 전해주고 싶다. 따뜻한 미소, 팀원의 이름을 외우려는 다정한 노력으로 지금 쌓고 있는 그 마일리지가 언젠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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