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감옥, 그 기본을 이루는 구조
연기법 공부를 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원적 실체적 관념'이라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원적이란 말은, 두 개로 나누어짐, 갈라짐, 쪼개짐, 분별 등의 의미이고 실체적 존재 관념이란 무언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느낌을 말한다.
이원은 숫자 2를 사용하지만 알맞은 이해를 위해서는 '분리' 혹은 '경계'로 받아들이는 것이 수월하다. 삼원적이든 사원적이든 혹은 다원적이라고 할지라도 '이원적'이라는 말속에 모두 포함된다. 그래서 별도로 셋으로 분리된다고 해서 삼원적이란 말을 쓰거나, 넷으로 분리된다고 해서 사원적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원적도 마찬가지다. 이미 '이원적'이라는 말속에 다 포함된다.
이런 이원성의 가장 기본의 개념은 단 하나를 취함으로써 발동되고 성립된다. 예를 들면 아무것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원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분리와 경계가 없다. 그러다가 무언가 하나를 취하게 되면, 단 하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이원으로 분리되는 것이다. 즉, 존재하는 이것과, 이것 이외의 다른 것(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분화된다. 다시 말하면 그 단 하나의 실체적 관념이 바로 이원적 분리를 만들어낸다. 이원적 분리는 바로 그 단 하나의 존재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존재에 대한 착각이 없으면 이원으로 분화되지 않는다. 이원으로 분화되지 않으면 존재에 대한 착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원적 실체적 관념'이란 말은 '족발'이나 '솔직한 고백', '새로운 발명'처럼 동어 반복인 셈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의 생각 시스템은 이런 이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이 실상과는 매우 다른 착각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이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보통 망상이라고 하면 뭔가 엉뚱한 생각이나 바르지 않은 생각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우리의 모든 이원적 생각 자체가 망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실상을 왜곡해서 보기 때문이다.
인식되기 위해서는 이원적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어둠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밝음이 있어야 하며 긴 것을 말하기 위해선 비교 대상인 짧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의도 없이 하나의 관념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관념이 아닌 그 대극인 쌍이 자동으로 떠올리는 행위가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순간 사람과 사람 아닌 것으로 분리가 일어난다. 사람 아닌 것이라는 개념이 없이는 사람이란 개념은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은 크게 언어적인 것과 이미지적인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둘 다 공통적으로 이원성으로만 존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 사과가 아닌 배경이 필요한 것과 같다. 사과를 떠올렸을 뿐이지만 사과 아닌 배경이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사과라는 단어를 떠올려도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인식되는 것은 이원적 분리를 필요로 한다.
사과라는 개념이 홀로 설 수 없다는 것은 사과라는 것 자체가 주체성이 없다는 말이다. 주체성이 없다는 말은 그런 것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떠한 모양이 되었든지 간에 그 모양은 대극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깨어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특히 이성적인 생각을 통해서 생각을 벗어나는 방식의 공부에서는 더더욱 핵심적인 포인트다. 사과가 사과 아닌 것들로 사과를 형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념적인 영역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밖이라고 여겨지는 현상 세계의 대상들도 마찬가지로 그것 아닌 것들로 그것이 일어서게 됨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의 핵심이다. 스스로 설 수없음, 그래서 스스로의 존재성이 결여된 모양 혹은 상태, 이것은 그것의 실체성이 빈 모양뿐이라는 말이다. 드러난 그 모양은 비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대극을 포함한 전체성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빈 것만은 아니다. 아직 이원적 인식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들을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의식상태에서는 드러난 그것이 존재성을 획득하지만, 실제로 이원성의 속성을 이해하고 꿰뚫어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전체성의 일 부분의 드러남으로 인식된다.
우리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나'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나'라는 말을 떠올릴 때 다양한 정의를 각각 믿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몸-마음이라는 유기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관점으로 얘기를 풀어보자. 이원성의 관점에서 '나'라는 것이 드러났다면 그 대극은 무엇일까? 나 아닌 것들이 바로 그 대극이다. 이 대극들은 개별적인 것일 수도 있고 집단적인 것 일 수도 있다. (종국에는 이 단수냐 복수냐의 차이는 의미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전체성에서는 단수다 복수나 논할 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전체성으로 하나일때는 복수라는 말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이원성의 관점에서 나가 나 아닌 것들이라면 '나'의 개별적 존재성도 마찬가지로 사라진다. 개념적 뿐만 아니라 실체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이원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나'가 단순히 개념임을 확인하는 과정은 실제로는 이렇게 아주 간단하다. 다만 이것이 깨어남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당연한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개체로서의 인간이 바로 '나'라는 이원적 실체적 믿음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예외 없이 이 부분이 걸림돌이 되어 헤어나지 못한다. '나'가 '나'아닌 것들이라면 '나'는 무엇인가?
'나'에 대한 어떤 정의도 이원성을 만들어낸다. 바르게 가는 길은 그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어떠한 수행이나 노력을 통해서 합일이라는 것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나'라는 정의를 포기함으로써 '나'는 개체적인 정의로써의 '나'에서 벗어난다. 이 경우 그동안 개체로써 해왔던 모든 경험들이 개체의 경험이 아니라 그저 정의 되지 않는 '나'의 전체적인 경험이 되는 것이다. 즉, 경험의 주체, 경험하는 자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경험만이 남는다.
이원성의 기본적인 속성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면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흑이 있어야 백이 있고 백이 있어야 흑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어려울 턱이 없다. 다만 그것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경우 여전히 이원적 실체적 관념으로 흑을 인식하고 백을 인식하기 때문에 깨어남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사과란 것이 존재하는가? 사과가 사과 아닌 것들이니 사과라고 할 것이 존재할 턱이 없다. 그러면 눈 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사과는 무엇인가? 오직 당신만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