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깨달음 #연기법 #비이원
데이트 폭력으로 꽃다운 삶을 마감한 불행한 이야기가 방송에서 흘러나온다. 아내와 딸은 세상 사는 게 무섭다며 조심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문득 죽음이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옮겨가더니, 갑자기 딸아이가 두려운 듯 울음을 터뜨렸다. 언젠가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실감 났던 모양이다. 태어났으니 죽는 게 당연하지만, 죽음 후에 이 모든 나의 세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결국은 잊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억울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방법이 없잖아.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잖아. 죽고 나면 블랙홀에 빠지듯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게 너무 무섭고 두려워. 뭔가 해결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방법이 없잖아…."
우리 삶의 바탕에는, 의식하든 못 하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깔려 있다. 이 두려움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어져, 환경을 변화시키고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키며,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삶을 유지하려는 수많은 해결책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 마치 하늘의 형벌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한다. 또는 상상력을 발휘해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위안을 얻는다. 이는 누구도 검증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신화적 의식 단계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그런데 2600년 전에 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왜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지 알고 싶어 했던 석가모니는 왕자라는 신분을 버리고 홀연히 답을 찾아 길을 떠났다. 결국 뛰어난 스승을 만나 고행을 통해 최고의 선정 단계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사람이 왜 죽고 태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지 않자, 이것이 공부의 바른 길이 아님을 깨달은 석가모니는 수행과 고행의 여정을 그만두고 함께 공부하던 도반과 스승의 곁을 떠나게 된다. 깊은 선정에 들어서는 고요에 머물렀지만 깨어난 후에는 여전히 의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보리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사유를 거듭한 끝에 결국 연기법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의 순간에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노라.”
“나는 모든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났노라”
그러나 석가모니는 80세에 죽었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120세로, 매우 장수한 편이지만 어쨌거나 육체의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다. 불사를 얻었다는 석가모니의 확신은 과연 착각이었을까?
태양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태양이 있어도 나무가 없으면 나무 그림자는 지지 않는다. 태양이나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는 지지 않는다. 태양과 나무는 그림자의 조건이 된다. 나무 그림자는 나무와 분리된 것인가? 나무 그림자는 태양과 분리된 것인가? 그림자는 나무가 아니고 태양도 아니다. 그런데 나무와 태양의 합으로 그림자가 생겨난다.
그림자는 그림자 아닌 것들로 인해 나타난다. 그림자라고 하는 특정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사과는 사과 아닌 것들로 인해 나타난다. 사과라고 하는 특정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연기법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림자가 드러나는 방식과 사과가 드러나는 방식은 똑같다. 사과가 드러나는 방식과 육체가 드러나는 방식 역시 똑같다. 육체를 드러내는 무수히 많은 조건들이 육체의 모양을 지탱한다. 당장 기압만 올라가거나 내려가도 육체의 모양은 형편없이 찌그러지거나 파열된다. 육체는 기압이 아니다. 기압도 육체가 아니다. 그러나 적정 기압이 없이는 지금의 육체는 이렇게 드러나 있지 못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생존의 조건이라 생각하지만 고정관념을 벗어나 그 관계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관계가 셀 수 없이 많다는 점이다. 육체를 육체이게 하는 원인과 조건들을 모두 나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온 우주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다. 그 무수히 많은 관계가 나무와 그림자의 관계와 같이, 서로서로 기대고 있는 듯 드러난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듯 말이다.
앞면이 없으면 뒷면이 없다. 앞면만 있다거나 뒷면만 있다거나 할 수는 없다. 태양이 있는데 나무 없이 그림자만 있다거나 그림자 없이 나무만 있을 수는 없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모양으로 현상적으로 드러난다. 사실은 단지 동전 하나 일 뿐이지만 이원적 생각으로는 앞과 뒤를 구분하고 서로 기대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듯 존재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바로 연기라고 한다. 연하여 일어난다는 말이다. 연기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것을 종교의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진실이 어디 종교라는 비좁은 바구니 속에 담길 수 있겠는가.
그림자가 따로 있고 태양이 따로 있고 나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표면적 상관관계의 이면에는 그것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님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꼭 양자역학에서 양자 얽힘 현상까지 갈 것도 없다. 이것은 우리가 밤에 달을 보고 낮에 태양을 보는 것처럼 뚜렷하고 명징한 사실이지만 이원적 관념으로 세상을 보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하거나 신비한 무엇쯤으로 간주한다. 일반적이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림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인식된다. 나무라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지만 그림자처럼 인식된다. 태양 역시 존재하지 않지만 그림자처럼 인식된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육체 또한 그림자와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고 인식된다. 이런 이상한 말이 익숙지 않겠지만 이것은 나무와 그림자의 관계를 정확히 볼 줄 아는 명철한 이성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고 의식의 진화의 결과다.
그림자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그림자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림자의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않고 그림자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그림자를 통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자가 사라져도 슬퍼하지 않는다. 이렇게 명확하게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의 본질을 볼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이다. 우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미련과 슬픔을 갖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그 착각은 이원성으로 펼쳐지는 세상의 기본 조건이다.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아기는 성장기를 거처 이런저런 즐거움과 슬픔의 드라마를 잠시 펼치다 늙고 병들거나 불행한 사고로 죽는다. 대충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명확히 살펴보라. 아기는 정자인가 난자인가? 아기는 엄마인가 아빠인가? 아이라는 생명의 시작은 과연 어디서부터 인가? 무엇이 태어난 것인가?
석가모니는 도대체 무엇이 태어나고 무엇이 죽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깊은 명상에서 선정을 통해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단지 태어나고 죽는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살펴보고 나서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그림자나 사과와 같이 원인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드러나, 실제로는 나고 죽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고 그것의 탄생과 죽음을 살펴봤더니 그 실체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존재한다고 착각했던 것은 단지 이원적 의식, 즉 생각의 구조에서 일어난 환영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맛볼 수도 있으니 이것을 과연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인식되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존재성이 없다. 인식은 되지만 개별적인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실체’로 착각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의 의식이 이원적 구조에서 작동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이 밝혀가는 결론도 이와 같다. 실체를 찾기 위해 무한히 쪼게는 과정에서 이상한 미시 세계를 발견했고, 궁극의 알갱이를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 어떤 것도 기존의 이원적 개념에 부합하지 않음을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혼란의 시기를 거쳐 기존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조금씩 수정하며 과학적 결과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의 이 말은 실상의 모습이 이원적인 관념에 억지로 맞춰질 수 없으며 그렇게 설명될 수 없음을 실토한다. 이 말은 미시의 세계가 거시의 세계와는 달리 뭔가 특별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분리의 세계관 자체가 제대로 된 해석이 아니라는 의미다. 물론 그는 거시 세계 역시 미시 세계와 동일하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본래 세상은 개별적으로 분리된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세상에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것’이라고 하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자나 사과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육체,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세운 개념인 ‘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과격한 신비론자의 주장이 아니라 이성의 궁극적 결론이다. 그림자가 나타난다고 해서 그림자가 태어난 것이 아니며, 그림자가 사라진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죽을 대상이 태어나야만 가능하고, 태어날 대상이 존재할 때만 성립된다.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노라.
석가모니는 불사를 얻지 않았다. 죽음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불사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았을’ 뿐이다. 새로운 지식을 터득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여실히 보았다.
나는 모든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났노라.
석가모니는 모든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모든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날 ‘나’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았을’ 뿐이다. 지식을 체득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서 고통과 속박조차도 고통과 속박 아닌 것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연기적 존재임을 확인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의문은 무시하거나 윤회나 내세를 믿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여실히 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힘은 이원적 실체관념(생각)으로 모든 것을 분리로 보는 이원의식을 포함하고 넘어서 존재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연기적 사유에서 비롯된다.
“그래도 어쨌든 이 육체는 죽는 거잖아? 그것이 죽음인 거고 그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는 거잖아? 이런 걸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이와 같은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공부에는 때가 있고 마음이 열리는 시기가 있다. 그때가 되어 이 글을 다시 볼 기회가 온다면, 그리고 정말로 연기법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런 의문이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는 직접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과 속박의 고통이 자신의 착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