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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이라는 꿈

#깨달음 #비이원 #개념 #꿈을꾸고있다는걸꿈에도모른채

by 나말록 Feb 13. 2025

개념의 개념

수의 세계


그룹화 추상화를 통해 엄청난 효율성과 발전을 경험했던 인간은 이러한 개념화의 이익에 대해서 거의 종교와도 같은 믿음을 갖게 됐다. 20세기가 까지 약 150여 년 동안 인류가 이뤄낸 성과들을 보면 그런 믿음에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이는 맨 처음 이름 짓기만을 통해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이름 짓기의 습성을 지속한 결과 그 위에 추상의 개념을 쌓아 올리는 것이 가능했고 그 결과 추상적인 수 즉, 메타 경계를 구축함으로 튼튼한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타 경계라는 말은 경계의 경계라는 말이다. 처음에는 사과라는 이름을 짓기 시작했고 숫자라는 개념을 통해 사과의 수를 셀 수 있게 되었다. 이 숫자는 단지 사과만을 다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이름 있는 것을 셀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는데, 세상의 그 무엇이든 구분되는 5개라면 모두 5라는 숫자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5라는 숫자에는 사과 다섯 개를 담을 수도 있고 배 다섯 개를 담을 수도 있고 다섯 명의 인간을 담을 수도 있었다. 이것이 경계의 경계, 즉 메타 경계다. 우리의 개념 짓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당연히 성공의 추억을 간직한 채 그것을 멈추기는 쉽지 않다. 인간은 한 발 더 나아가 대수학이라는 경계의 경계의 경계도 만들어냈다.  이제 x, y, z를 통해서 모든 수를 나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백 년 동안 개념화를 통해 경계 만들기에 몰두해 온 인류는 급기야는 본능적으로 분리라는 것을 세상의 속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받는 교육은 개념을 익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개념화를 잘하는 순서대로 사회적 기회가 주어지므로 언제나 개념화 우등생들이 사회적 힘을 갖는다. 그렇게 순환이 이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개념을 기반으로 이원적 탐구를 계속하던 과학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경계 짓기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와버렸다는 점이다. 기존의 고전물리학을 탐구하던 같은 방식으로 물질의 본질을 파해쳤는데 더 이상 이원적 분리로 경계 짓기가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야말로 고전물리학의 바탕이 허물어지는 엄청난 일이 수십 년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벌어지고 만 것이다. 바로 양자역학의 등장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비주의적 관점의 당위성을 위해 양자역학을 예로 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선은 내가 양자역학을 과학자들보다 잘 모르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과학적 접근 방법을 통해 도달한 결과가 아무리 비이원적이라고 해도 그 이원적 접근 방법 자체를 겨누는 나의 이야기와는 범주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양자역학의 등장은 고전물리학의 바탕을 흔드는 것 외에도 우리의 인식에 대한 통찰을 되돌아보게 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과학이라는 이원적 사유방식의 결과로 마주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신비주의자가 단상에 올라가 비이원을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숫자라는 것이 그저 개념 위에 얹어진 또 하나의 개념이라는 말을 이해하더라도 그 믿음이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개념 자체도 고정관념으로 규정하는 나에게는 수의 세계도 역시 흔들어야 할 고정관념이다. 아무리 정확하고 논리 정연하더라도 역설적으로 그렇게 정확하고 논리 정연하다는 이유 때문에 개념인 것이고 벗어나야 할 고정관념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여전히 이성적인 능력과 과학기술은 삶에 유용하게 활용해야 하고 논리적인 전개를 통해서 제도와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다만,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알고 몰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잊지 않을 때 그로 인해 야기되는 불필요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하학

존재하지 않는

개념의 세계


수학의 세계와 현실의 괴리는 서로 닿을 수 없는 열차의 레일과 같다. 결코 접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관련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생각과 개념 세계에 속의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육면체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점만 살펴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하학에서 말하는 정육면체는 사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육면체의 정의를 살펴보면 쉽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정육면체란? 한 개의 꼭짓점에 3개의 면이 만나고, 6개의 정사각형 면으로 이루어진 3차원 정다면체로 사각기둥의 한 종류이다


 정육면체가 성립하려면 우선 면이 있어야 하고 면이 있기 위해서는 선이 있어야 하며 선이 있기 위해서는 점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면은 선의 모임이고 선은 무수히 많은 점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점의 정의를 보면 정육면체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점(點)은 크기가 없고 위치만 있는 도형을 말한다. 점은 유한직선(有限直線)의 일단(一端)이며, 선의 교차에 의하여 생긴다. 점은 선, 면, 도형 등의 기초가 된다.


점은 크기가 없고 위치만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크기가 없이 위치만 존재한다니 세상에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사실 점이란 건 생각 속에만 존재가 가능할 뿐 실제로 세상에 등장할 수는 없다. 아무리 미세한 점을 종이에 찍더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면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점이라는 개념 위에 선이 만들어지고 선이라는 개념 위에 면이 만들어지고 면이라는 개념 위에 정육면체가 탄생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점이란 녀석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자산인 ‘위치’라는 것은 또 뭔가. 과연 어디를 기준으로 한 위치인 걸까? 적어도 그리니치 천문대나 적도와 같은 이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가상의 것을 세상에 세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할 테니 그 위치 역시 개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믿을 수 있겠어?
모든 시작은 크기가 없고
위치만 있는 것이었어!!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가 자신의 저서 ‘원론’에 이러한 공리를 정의했다. 이런 공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살아가는 기본 환경이 된다. 공리란 수학, 논리학, 혹은 다른 형식적 체계에서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사용되는 명제나 진술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리는 증명되지 않으며, 대신 직관적으로 명백하거나 합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명제로 간주된다. 그런데 나는 이 공리에 순순히 합의한 적이 없다. 당신은 어떤가?

 
 그 시작의 임의성이 그 위에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유클리드의 마음이 바로 우리의 삶과 같다. 어떻게 시작 됐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살아가는 인생을 위해 시작과 끝을 정한다. 유클리드는 공리를 만들었지만 우리는 과학과 종교를 만들었다. 누군가는 과학의 빅뱅을 그 시작으로 맞이하고 누군가는 신을 그 시작으로 맞이했다. 그렇게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공리는 그 쓸모가 다수에게 용인되면 발전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이 대단한 재주를 부릴 수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은 우리의 생각 속 개념이라는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론 물리학에서 다루는 수학의 세계는 사실 매우 경이롭다. 관찰되지도 않는 것을 미리 발견하기도 하고 자연에 존재하는 힘을 공식으로 정리해 기술 개발에 활용하기도 한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는 거대강입자충돌기(LHC)를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지대 지하 175m 깊이에 내부 공간에 27km 크기로 만들어 입자 충돌 실험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를 통해서 물질의 기본 구조에서부터 우주의 시작까지 보통 사람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연구를 진행한다. 인간의 이성이 이렇게까지 이원적으로 고도화될 수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 또한 자연이 꽃을 피워내듯 인간에게 있어서 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복잡성을 생각하면 우리의 그런 이원적 재주는 사실 단순한 것이다.
 
 이름 짓기로부터 시작된 분리의 여정은 숫자라는 마법의 시간을 거치고 이원적 성취의 놀라움에 압도당하는 사이 결국 양자역학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로만 보면 인간은 이원적 환상에서 벗어나기 직전인 것 같지만, 그것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데는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리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이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을 만큼 혁명적이고, 우리의 인식의 오류를 수정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인식 자체의 변화를 주지 못하고 과거의 인식 구조를 유지한 체 문 밖에서만 서성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피해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스스로를 세계와 분리시키고 고립시키는 결과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분명 많은 것이 발전하는데도 주위를 돌아보면 그 발전 수준과는 정 반대의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목격한다. 이것은 우리가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믿고, 리더라고 믿고 있는 높은 양반들의 세계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무기는 내일부터 폐기합시다. 이 간단한 결정을 실행하지 못하는 어른들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해줄 변명은 그저 궁색하다. 너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어…라고 자신도 이해 못 할 말을 둘러대는 수밖에 없다. 이런 발전의 묘한 불일치와 세계로부터 분리된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물리적 꼬리의 퇴화를 거처 이제는 의식의 꼬리를 자각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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