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by pathemata mathe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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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누군가(개인일수도 법인일 수도 있지만)의 하수인이 되어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365일 중 12번 있는 월급날 때문에 250일 정도를 출근해야 한다.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하루에 8시간 정도 근무해야 하는데, 당연히 누군가가 만든 규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근로계약서에 따라 월급을 받으니 계약 준수를 위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 역시 월급 받는 신세이기에 출근을 한다. 다른 사람과 조금 달리 8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한다. 아침 시간외근무를 할 때면 거의 6~7시 사이에 출근할 때도 있다. 이렇게 새벽에 출근할 때면 서울의 지하철 풍경은 사뭇 다르다. 한국인보다는 저임금 노동자 외국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하철이 정차하여 문이 열리면 뛰거나 혹은 뛰다시피 걷는다. 한 달의 한 번 송금을 기다리는 본국의 가족들을 위해 새벽잠을 떨치고 뛰어다니는 것이리라.


평상시와 같이 출근하면 이들이 출근을 마쳐서인지 상당히 한적한 편이다. 적당히 떨어져 서 있을 수 있어 나름 지하철을 탈 만하다. 나는 직장이 다행히 가까운 편이라 2코스 정도만 지하철역을 거치면 된다. 하지만 역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기에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마을버스 역시 이 시간엔 사람들이 많이 타지 않는다. 만일 한 시간 정도 늦게 9시까지 출근한다면 풍경은 다시 바뀐다. 지하철도, 마을버스도 사랍들 투성이다. 내가 있을 자리는 사실 많지 않다. 그래서 이 경우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겨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이 지하철, 마을버스 안 한 가득이다.


나는 내 골디락스와 같은 출근시간대가 좋다. 그래서 조금 잠을 줄이더라도 일찍 출근하는 것이 내 취향에 맞다. 짧은 통근거리지만 책을 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책을 무겁게 가지고 다니며 읽는 게 무슨 청승인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잘 했다는 생각만 든다. 이상하게 출근시간에 읽는 책이 더 잘 읽힌다. 어쩌면 쓸데없이 소모되는 시간을 극적으로 살리는 기분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 출퇴근 길은 도서관 안이 된다. 그리고 타인의 소음이 줄어들고 도착까지 지루함이 사라진다. 무엇보다 타인과 시선을 우연히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진다. 우리나라는 외국과 달리 모르는 사람에게 매우 적대적인 편이기에 효과적인 방패인 셈이다.


가끔 나와 비슷한 사람은 없는지 한 번 둘러보곤 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듯하다. 어쨌든 내가 타인들의 그런 무료한 모습에 지적인 허영심 내지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독서의 좋은 점이다. 내가 책을 읽는다고 해서 부의 추월차선을 따라 출근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 같진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삶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 들어볼 순 있다. 대리만족이라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출근길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시간을 제외하면 걷는 시간과 대중교통, 그리고 사무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구성된다. 먼저 걷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대중교통은 아파트 주차장에 있는 자가용이 아니므로 멀든 가깝든 무조건 정류장(역)으로 걸어가야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에는 일정한 탑승 주기가 있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이 제시한 시간이 곧 법이다. 이를 타려는 승객들은 잰 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뛰어다녀야 한다. 특히 출근시간이 임박한다면 체면 차릴 새 없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일군의 사람들이 단체 단거리 대회를 연다. 승자는 탈 기회를 얻겠지만 패자는 다음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동적인 움직임과 달리 막상 버스 정류장(지하철역)에 도착하면 줄을 서서 망부석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제시간에 출근을 못 하게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최소한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소일거리를 하면서 지루함을 달랜다. 마지막으로 출근길의 백미는 사무실 엘리베이터이다. 1층이 사무실이 아니라면 이제 달리기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승강기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가끔 지각을 하게 되면 이 짧은 기다림의 시간이 영겁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렇듯 출근길은 고통 그 자체이다. 고통이 없는 출근길은 출근이 아닐 수 있다. 아무리 여유롭게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수고로움이 조금 덜어질 뿐이다. 짧은 며칠간 휴식을 지내기 위해 무수히 많은 날을 인내해야 하는 것을 암시하는 건지도 모른다. 반면에 퇴근길은 한결 더 마음이 가볍다. 그것은 인간의 단순함 때문일 것이다. 하루를 견뎌냈음을 자위하는 움직임에 그다지 반성은 없다. 반면, 출근하는 마음은 대체로 무겁다. 가벼운 마음의 출근은 '곡선 없는 원'과 같은 논리적 모순 아닐까? 따라서 이러한 무의식은 자신이 억압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퇴근은 일시적 해방이라면 출근은 구속의 시작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왜 출근해야 하나? 회사에서 받는 월급 때문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 예를 들어 퇴직과 같이 직장에서 출근을 거부당하는 상황에 내몰린된다면 지루한 출근이 더 없이 소중해질 것이다. 불현듯 회사에서 주는 돈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감사할 것이다. 즉, 내 가치가 출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곳에 출근하느냐는 정말 중요한 요소이겠지만, 그 점은 차지하더라도 출근할 수 없는 처지에 비하면 우월감을 가질 만 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은 시간 준수이다. 우리는 출근이라는 예식을 통해 시간을 엄수하였음을 직장과 사회에 매일 증명해낸다. 학창 시절에는 등교를, 그 전에는 등원을 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일견 불필요해 보이는 학교 커리큘럼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학교는 배움의 전당이 아니다. 학교에서 시간을 준수하는 것을 강제했기 때문에, 출근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했다. 학교는 감옥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한 미셸 푸코의 견해처럼 말이다. 수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출근시간을 가지고 있다. 착유하는 순서를 기다리는 젖소처럼, 각자의 시간대를 목표로 하여 일정한 속도로 걸어간다.


산업혁명에 따른 도시화 이전에는 노동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 대신 노예가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 노예조차도 농경사회에 걸맞게 아주 가까운 거리를 출퇴근 했을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서울에 사는 직장인은 평균 80분 정도, 경기도는 100분을 쓰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평균의 함정이 있기에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출퇴근에 사용할 것이다. 일을 하기 위해 출근하는 것은 굉장히 근대적인 살풍경이다. 우리는 휴가를 내서 여행가는 것을 출근한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설령 비싼 돈을 들여 비행기를 24시간 가까이 탄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 단어를 입 밖에 올리지 않는다. 오직, 남을 위해 일을 할 때만 출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출근하지 않는 삶은 어떨까?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인해 재택근무가 상당히 보편화된 적이 있다. 나 역시 재택근무를 한 적 있다. 출근하지 않고 근무를 하면 무엇보다 억압받는 느낌이 들지 않긴 했다. 누군가에게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옷을 입을 필요도 없고,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한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출근하지 않았기에 퇴근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서인가? 일과 나의 개인적 삶이 출근과 퇴근이라고 불리는 시간과 공간으로 구분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마 자영업자들 중 일부는 자택과 매장이 한 건물에 같이 붙어있는 경우가 있을텐데 비슷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결국 출근길은 그다지 유쾌한 길이 아닌 것은 분명하며, 내가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해 출근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굴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함으로써 퇴근이 생성되는 것이다. 헤겔의 원환(圓環, Kreis) 안의 원환처럼 말이다. 출근과 퇴근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어딘가로 나아간다. 그저 대중교통을 타며 소모되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위대한 삶의 여정을 시작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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