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싱가포르인가
뚱이와 싱가포르에 가기로 했다. 이 여행은 무려 출발 1년 전에 비행기 예약을 마친 장기 프로젝트이다. 1년간 목이 빠져라 여행 날짜를 손꼽아 세며, 기다림의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글을 쓰는 지금은 그래도 반년 밖에! 안 남았다.
아이와 함께 가는 여행은 쉽지 않다. 여행지를 정하는 것부터, 먹고 자는 것도 결정하기 쉽지 않으며, 짐은 n배가 된다. 그럼에도 나는 떠나고 싶은 엄마다. 뚱이와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참 많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비행기를 처음 타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고, 공항에도 가보았다. 친구들과 함께 도쿄로 떠난 1박 3일의 빡세고 고된 밤도깨비(지금도 이런 이름을 쓰나?) 여행이었다. 출발 직전까지 종강 과제를 하느라 심신은 지쳐 있었고, 사실 어디로 무엇을 보러 가는지도 잘 모르고 떠난 여행이었다. 그렇게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떠난 첫 번째 여행에서 나는 완전히 반했다. 잘생긴 남자가 아닌, ‘여행’에게 말이다.
이른 새벽 패스트푸드점에 앉아서 선크림을 바르던 일도 생각이 나고, 크림이 잔뜩 든 롤케이크를 먹고 감동했던 생각도 난다. 후에 이 롤케이크 집이 한국에도 지점을 냈다는 얘기를 듣고는 첫사랑을 만난 것 마냥 반가웠다.
스물두 살의 도쿄를 시작으로, 나는 늘 다음 여행을 소망했다. 나의 이십 대는 대체로 시간은 있으나 돈이 부족했다. 여행은 시간과 돈, 이 두 가지가 고루 갖춰지는 타이밍에 갈 수 있는 것이었다. 내 앞가림은 하고 살아야 하기에, 작디작은 사회 초년생의 월급으로 적금을 먼저 붓고, 대학원 학비도 모으고, 또 야금야금 모아 여행경비도 만들었다.
그러므로 여권에 찍힌 도장들을 보면, 엄마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는 없는 살림에 혼자 우리 남매를 키우시며 내가 젊음을 원 없이 누리도록 생계를 짊어지셨고, 최선을 다해 지원해 주셨다. 덕분에 대학 때 과외수업을 하며 모은 돈으로는 유럽을 다녀올 수 있었다.
이후 직장인이 되고서는 다 큰 딸을 공짜로 먹이고 재워주셨다. 나의 첫 직장은 도보 출근이 가능한 곳이었고, 나는 쇼핑을 비롯한 돈 드는 취미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아낀 생활비와 용돈으로 매년 인천공항에 가는 호사를 누렸다. 당시의 형편과 학자금을 갚는 주위 친구들을 생각하면 과분한 일이었다.
얼마 전, 뚱이의 전집을 한 세트 새로 구매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특징과 문화를 소개하는 책이었는데, 부록으로 예쁜 세계지도와 기내용 가방을 받았다. 이 세계지도에 앞으로 함께 가고 싶은 나라를 꼽아보는 것은 나의 큰 즐거움이다. 뚱이는 나 때문에 여행은 즐거운 것이며 행복한 경험이라고 자주 세뇌당하고 있다.
뚱이가 다섯 살이던 작년 여름에 북해도에 다녀온 이후, 나의 희망 회로는 자연스럽게 ‘다음엔 어디 가지?’로 항했다.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여행지를 정하는 것은 쉽고도 어렵다. 가고 싶은 곳이 많기 때문에 후보지는 넘쳐나지만, 여러 조건에 부합하는 곳을 딱 낙점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원하는 여행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너무 멀지 않은 곳.
유럽이나 미대륙은 탈락이다. 여행의 필수 조건은 시간 그리고 돈이다. 일단 함께 갈 짝꿍인 남편에게 그 정도의 시간이 없으며, 이렇게 먼 거리의 여행은 예산 초과이므로 가면 굶어야 된다. 따라서 비행시간은 최대 6~7시간까지!
두 번째, 내가 안 가본 곳.
세상에는 내가 가본 나라보다 안 가본 나라가 훨씬 많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내 위주라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정말 좋았던 여행지는 다시 한번 함께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남편과 나 둘이었던 신혼여행지 시애틀에 셋이 되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눈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겨울의 북해도를 뚱이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처음 가보는 곳으로 후보를 추렸다.
세 번째, 마일리지와 기타 등등.
너무 더워도 안 되며 너무 추워도 안 되고, 치안도 중요하고, 휴양만 해야 하는 곳이면 지겨워서 안 되고, 등등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남편이 모으고 모아 온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쓰기로 했다. 엄청난 마일리지 적립률 때문에 순식간에 단종되었다는 전설의 신용카드 중 하나를 남편이 장기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항공권은 마일리지 결제가 가능한 곳으로 후보지가 또 압축되었다.
그리하여 이 엄청난 경쟁을 뚫고 뚱이의 두 번째 해외 여행지로 선정된 곳이 바로 싱가포르였다. 원하는 날짜의 마일리지 표를 선점하기 위하여 1년 전에 표가 풀리자마자 예약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우리가 원한 날짜는 뚱이의 여섯 번째 생일이 있는 1월의 어느 주말이었다. 70만원 정도의 개인부담금이 있었고, 미리 계획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지출이라 한 10초쯤 고민했지만, 가기로 했다.
1년 전에 항공권 예약을 마치고 내가 하도 싱가포르 노래를 불러대는 바람에, 남편은 3박 5일 여행이 아니라 아예 이민을 가는 거냐며 놀리기도 했다. 그 정도로 좋았다. 이제는 이 설렘을 나보다 더 큰 오두방정으로 함께 해 줄 나의 미니미도 있고, 싱가포르 이민 준비에 버금가는 정보 수집 시간도 넉넉하다. 언제 오나 했던 25년 1월이 이제 반년 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