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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Mar 24. 2017

좋다: 금요일의 낭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암스테르담이 그렇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진을 넘겨보며 다시 한 번 그 때의 생각에 잠긴다. 어느 좋은 날의 도시 낭만을 즐기기에 금 쪽 같은 청춘의 시간이 아깝지 않은 도시였다. 기쁘게도 오전과 달리 뿌연 하늘이 어느새 새파랗게 바뀌어 갔다. 시내를 걷다 보면 문득 "이 수로가 아까 지나친 그 수로인가?"라며 혼동이 밀려 온다. 도시 전체에 거미줄을 친듯이 방사형으로 뻗어져 있는 수로들은 이방인의 눈에는 모두 같은 물길이다. 잠시 머물며 곳곳의 차이점을 알아채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곳이기에 지도가 없다면 길을 잃어 버리기 쉽상이다.



이방인에 눈에는 어디를 봐도 기울어진 건물들과 그 사이를 흐르는 수로. 미로 속에 빠진 느낌이 나쁘지 않다.




신나는 금요일, 이 곳은 뭘해도 낭만충만


"언니 여기 찾을 수 있겠어?"라고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비치는 <양양(암스테르담에서 회사원의 삶을 살고 있는 나의 절친)>이 보내준 가게 주소와 지도를 확인했다. 암스테르담에 처음 들렀을 때도 이 곳 현지인들에게 최근 핫플레이스라는 <요르단(Jordan)> 구역에 간 적이 있는데, 우리가 오늘 가려는 가게도 그 곳에 있다고 했다. "응 그럼, 난 지도 한 장과 두 다리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 조금의 허세를 부려봤다. 금요일이라 저녁 시간에 예약은 불가하다는 약속 장소는, 주소만 문자 메시지로 받았을 때 당연스레 머리 속에 있는 보통의 레스토랑을 떠올렸었다. 직장인 친구가 퇴근 길에 부리나케 시내로 달려와도 6시가 넘기에, 내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잔 정도 주문을 해두는 걸로 계획을 세우고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암스테르담 도시 정보가 있는 <City Mapper(지도앱/실시간 교통 정보와 지도, 근처 가 볼만한 곳을 추천 해주어 혼자 다니는 여행에 도움이 된다)>로 주소를 찾고 교통 편 안내를 따라 <Singel>에서 트램을 타고 근처에 내려 5분 정도를 걸었다. 주소에 나온 도로명을 발견하고는 생각보다 빨리 찾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 해졌지만 그것도 잠시. 상세 주소에 적힌 숫자는 눈 앞에 스쳐가는 건물에 붙어 있는 어느 숫자와도 맞지 않았다.


뱅글뱅글 주위를 돌다 보니 저 멀리 또 다른 수로 쪽에 좌우로 넓게 펼쳐진 네모 반듯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물가에 놓인 가게는 뜨거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수로와 하나가 되어 낭만적였고, 원색의 화려한 페인트로 칠한 건물 내부는 활기가 넘쳤다. 성큼성큼 걸어 가보니 이게 왠걸,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는 젊고 훤칠한 남녀는 퇴근하고 모두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내나?싶을 정도로 훈훈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오후 6시도 되지 않았는데 역시 이 곳도 영국과 다르지 않았다. 야근이 익숙하지 않은 대륙의 사람들에게 풍기는 삶의 여유는 그들의 생활 속에서 피어났으리라.


 수로가 보이는 테라스 석은 전체가 이미 더치 젊은이들에게 점령 당해 있었다. 건물 안 쪽에 좌석도 절반 이상이 차 있었는데 유독 창가에 놓인 쇼파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줌마>라 불리워질 날이 오는 것이 두려운 내게 대한민국의 땅과 공기에서 생활하며 내 몸에 자연스레 내재 되버린 대한민국 아줌마의 근성으로 냅다 가방부터 쇼파의 정 중앙에 던져두고 BAR로 다가가 에일 두 잔을 주문했다. 커다란 쇼파 한 가운데 철퍼덕 앉아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마신 뒤 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한참을 그렇게 하염 없이 흐르는 수로를 바라봤다. 햇살과 흐르는 물, 시원한 맥주와 집에 옮겨다 놓고 싶을 정도로 폭신한 쇼파까지. 나른한 나의 어느 오후에 낭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감질나는 네덜란드


물론 큰 잔을 주문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 맥주를 주문하면 나오는 잔은 300ml이다. 독일에서 작은 잔이 500ml, 영국 펍에서 맥주 한 잔 달라고 하면 나오는 건 파인트 사이즈 500ml. 이런 맥주 문화를 즐겨 온 나인데, 암스테르담에서는 주문한 맥주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마시기 시작하면 앉자마자 다시 일어나 새 잔을 주문하러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긴다. 그러더니 그 짧은 사이 2잔 동시 주문하기 노하우를 익히게 됐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므로. 



내 것과 남의 것으로 주문한 맥주 두 잔은 모두 내 것이 되었고 또 다시 두 잔이 생겼다. 아무 것도 마시지 않은 듯이.


퇴근 시각, 게다가 금요일이니 교통 대란은 이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랴부랴 달려 온 나의 오랜 친구 양양이 도착했다. 몇 달 만의 재회에도 부둥켜 앉고 탁 트인 창가에서 마음껏 소리내어 웃었다. 좋은 인연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웃음을 짓게 하는 매력이 있고 내게는 그녀가 그 중 한 명이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풍경 엽서로 써도 될 만큼 목이 좋은 자리에 양양 역시 감탄했고 연신 <좋다>는 탄성을 자아냈다. 날씨가 좋아서 좋고 볕이 잘 들어 좋고 시원한 맥주를 함께 할 수 있어 좋고 또 좋은 사람과 함께 하니 좋고. <좋다>는 표현 외에는 이 모든 것을 함축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양의 지인이 이곳을 찾아왔고 우리와 저녁 시간을 함께했다. 한국에서 음악을 공부하러 네덜란드에 왔다는 그녀는 우리와 비슷한 또래인데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느라 다시 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네덜란드에 도착해서 새로운 생활과 언어, 문화 그리고 사람들을 겪으면서 고군분투 하는 그녀와 양양의 이야기는 한 편의 모험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고 나는 금새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네덜란드 음식인 비터발렌과 크로켓이 먹고 싶어 주문한 플래터. 스프링롤이 함께 있어 당황했다.


붍타는 금요일의 낭만을 함께한 나와 양양



2차 가야지


"치맥 어때?여기 한국이랑 비슷한 치킨을 팔아"라고 해서 양양을 따라간 <Bier Fabriek>. 어둠이 내려 앉았는데도 선선한 기운이 좋은 밤이라 우리는 거리에 놓여 있는 테이블 중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우리 쪽으로 걸어 온 직원에게 BBQ Farm Chicken과 맥주 세 잔을 주문했다. 역시나 이 곳도 감질나는 300ml 잔이다...라고 하려다 커다란 잔을 들고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키는 한 아저씨의 모습을 포착하고는 잽싸게 <큰 잔>을 외쳤다. 속을 뻥 뚫어주는 맥주와 사이다 같이 청량한 여자들의 수다를 이어가다 보니 주문한 닭 요리가 등장했다. '정말 한국에서 많이 보던 닭이다'를 생각하며 연신 여자 셋이 눈 앞에 보이는 닭고기를 개걸스럽게 먹어댈 때, 불금을 보내고 있는 남자 넷 중에 키가 제일 큰 더치 청년이 말을 걸어 왔다. 불과 삼 년 전의 나였다면 '이 남자 왜 이렇게 추근대?'라고 여겼을 텐데 이제는 이렇게 펍에서 주변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고 친분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 이 곳 사람들의 문화임을 알기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나중에는 우리 셋과 네덜란드의 젊은 청년 넷이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맥주를 마셨다. 은행원과 학생, 또 스타트업을 했다는 그들의 이야기들을 듣는 것도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젊음을 즐기는 모습을 공유하는 이 순간이 소중했다. 나중엔 야속한 시간이 아쉬워, 우리의 대화가 즐거운지 우리와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운 그들을 남겨둔 채 가게 안으로 들어가 우리만의 리그를 다시 시작했다. 여자들의 수다는 왜, 언제나 새로운 걸까. 


이곳에서는 서비스로 땅콩을 껍질 채 줘서 모든 사람들이 땅콩을 까 먹는다. 그러니 바닥이 온통 땅콩 껍질로 가득한 게, 마치 커다란 햄스터 우리같다. 그렇게 우린 남은 술잔을 기울였고 산더미처럼 쌓인 땅콩 껍질과 함께 하는 우리의 금요일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젊음을 공유하는 순간이 소중하다. 어디에서든 누구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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