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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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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Apr 25. 2017

운수 좋은 날




무지막지한세일 폭격

<Reduziert>

<Rabatt>

단어만 봐도 가슴이 두근두근 해진다. 세일이다.


그 동안 미뤄두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접어 두었던 쇼핑 욕구를 꺼내어 리스트를 펼친다. 독일에 있어 연말의 세일 향연은 고래도 춤추게 할 정도이다. 미국에는 <블랙프라이데이(Black Friday)>가 있고, 영국에는 <박싱데이(Boxing day)>가 있듯이 독일의 연말 세일은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시작하며 정상가의 30~40%가 내려간 금액이 세일 가격의 시작이다. 세일 기간이 끝나갈수록 세일 폭은 50~70%까지 점점 커진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실 사람을 싫어한다고 말하던 게 나였던가싶을 정도로 금전적인 혜택에 흥분이 되었다.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몇몇 브랜드는 많은 사람들도 나처럼 세일의 시간을 기다린 건지 세일 표지판이 매장 앞에 걸리자마자 첫 날부터 사람들이 꽤나 북적댄다. 심지어 평일 아침에도. 사계절을 구분할 수 없는 날씨 덕분에 나는 이월 상품의 개념도 잊은 지 오래다. 한국을 떠나 독일이라는 곳에 와서 세일 기간에 덕을 보는 건 바로 옷이다. 한국이었으면 언제나 할인 시즌이 되면 S, M사이즈가 먼저 동이 나 커다란 사이즈들만 남아 있겠지만 이 곳은 S사이즈가 많이 남아 있었다. 평범한 동양인 여성에게 이런 혜택 정도는 주워지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세일의 향연이 이어지던 어느 날. 이 참에 온라인으로 판매할 제품들의 샘플을 다양하게 구해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독일에 넘어와 온라인 구매대행을 시작했고, 홍차와 과실차를 주로 취급했는데 여러 제품을 접하고 시음을 하는데 적잖은 비용이 발생되었기에 할인 기간은 이제 겨우 스타트업을 한 내게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마음까지 잿빛으로 변해버릴 것 같은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오늘따라 화창한 날씨이다. 은행에 들러 현금을 인출하고나니 내게 현금이 1천유로가 넘게 있었다. 부유했던 적이 없으니 괜히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게 부담스러웠다. 집에서 너무 일찍 나온 바람에 제품을 구입해야 할 티 하우스들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가게들이 영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노트북으로 밀린 일을 좀 해보려는 생각으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바로 맞은 편에 있는 별다방에 들어 갔다. 여러 번 움직이는게 싫어 제일 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에 에스프레소 샷을 하나 추가했다. 진한 커피를 마시며 온라인 상점에 제품을 등록하고 고객센터에 등록된 문의 내용에 답 글을 올리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그 때 쯤일까? 주위에 온통 빨간 유니폼의 무리들이 가득 차 있었다.이런.오늘이 아마 프랑크푸르트의 분데스리가 홈경기가 있는 날인가보다.더 번잡스러워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짐을 꾸리는데 허전함이 느껴졌다.


운수 좋은 날
‘뭐지?’


순식간에 하늘이 보랏빛으로 바뀌며 뇌에 혈액이 공급이 되지 않는 느낌이다. 가방에 있어야 할 파우치가 사라졌다. 그 안에 현금과 카드지갑,그리고 한 달치 교통 티켓이 들어 있다. 게다가 은행의 공인인증서는 물론이요 그 동안의 나의 일과 관련한 자료들이 저장된 USB까지. 한차례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는데,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더욱이 치안이 잘 되어 있기로 알려진 독일에서 눈뜨고 코를 베인 느낌이다. 카페 직원들에게도 사정을 얘기하고 인적 사항을 남겼다. 원래도 사람이 붐비는 매장인데 가뜩이나 프랑크푸르트 구장에서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에 빨갛게 유니폼으로 무장한 응원부대들까지 더해져서 직원들도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CCTV가 없다고 얘기하고는 형식적으로 연락처를 적어두라고 하는 말이 "네 지갑은 이미 털렸으니, 그냥 잊고 살아."라고 들려왔다. 인적 사항이라고 해봤자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 또 혹시 몰라 집 주소까지 남겨 두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서 있을 수도 그렇다고 가진 전 재산을 털려버린 곳에 앉아서 시간을 보낼 수도없는 노릇이었다. 집에는 어떻게 가지? 마침 홍차공주는 오스트리아 여행 중이고 내가 연락해서 집에 가는 교통비를 가져다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곳에 누가 있지? 했으나 막상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없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교통 티켓도 없이 무작정 집으로 가는 에스반에 올랐다. 설령 이 상황에 내가 검사원에게 발각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울어버릴 참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서랍을 뒤졌다. 비상용으로 남겨둔 신용카드 두 장과 여권. 상황이 최악은 아니라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면서 두 다리도 풀려 버렸다. 침대에 누워 한 손에는 여권을 쥔 채 잠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한국에 갈 때까지 현금 인출카드가 없어진 탓에 신용카드로 현금을 인출하는 번거로움이 생겼다.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나 그 후로도 사라진 파우치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세일 기간이라고 들뜬 내가 부족했다. 분명 이런 때에는 소매치기도 성행한다는 것을 왜 진작 생각하지 않은 건지. 내가 조금만 일찍 일어났다면, 잃어버린 모든 것들은 과연 내 가방에 온전히 남아 있었을까?


아침부터 날씨가 그렇게 좋더라니 @프랑크푸르트,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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