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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Apr 26. 2017

고진감래의 독일(feat. 인터넷 설치)



고진감래의 독일

기다림의 미학. 

대한민국에서 이십 년 넘게 살아온 사람으로 해외에 나가 적어도 몇 달 이상 체류해 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든 공감할 테다. 관공서에서 서류 한 장 처리하러 가는 것도 하루 반나절이 소요된다. 어딜 가나 무인처리기까지 등장하여 인생의 스피드를 즐기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갈증을 채워주는 한국의 시스템은 가히 세계 최고의 LTE급 속도를 자랑한다. 초고속 시대에 익숙한 사람이 처음 해외에 나가 무언가를 처리하려면 배꼽 아래쪽부터 깊숙이 올라오는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이미 스물 둘에 브라질에서 외국인 등록증 하나를 신청하겠다고 내리 사흘을 관공서에 왔다 갔다 하는 헛수고를 한 적이 있었다. 아침 9시부터 가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마감 시간이 되도록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분명 내 앞에는 다섯 명도 없었는데. 그렇게 세 번이나 물을 먹고 겨우 서류 한 장의 처리를 끝냈었기에 나름의 해외 생활에 속도에는 보폭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나라고 여겨왔었다.


그런 내가. 선진국 독일에서 무한한 기다림속에 길을 잃어버렸다. 내가 머무는 집에 인터넷을 설치하는 그것이다. 휴대폰 통신사로 이용하는 <O2(오투)>의 홈페이지에 신규 회원 가입을 하고 인터넷 신규 설치를 신청하였다. 상점에서 물건을 주문하는 것 외의,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는 인적 서비스에 있어서 독일은 항상 사전에 약속을 하는 것이 먼저이다. 며칠 후에, 인터넷 설치 담당자가 집을 방문하는 일정에 대해 연락이왔다. 세상에. 한 달을 기다려야 인터넷 설치 기사가 집을 방문한다니. 온라인 상에서 90% 이상의 업무가 진행되는 나에게 인터넷이 없는 한 달은 딱 화장실이 급한 타이밍에 멈춰버린 엘리베이터에 갇힌 채 수리 기사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




인고의 시간이 흘러 한 달이 지나갔다. 

한달간의 인터넷은 지인의 사무실과 후배의 집, 그리고 전세계 여행객의 필수 코스인 별다방이 인터넷을 향한 나의 타는 목마름을 채워 주웠다. 별다방의 무선 인터넷은 우리나라와 속도의 차이가 확연하여 사진을 한꺼번에 다섯 장 정도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붐비지 않는 이른 아침에야 비교적 빠른 인터넷 속도를 즐길 수 있었기에 매일 아침 별다방으로 출근 도장을 찍은 뒤에야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챙겨준 인터넷 전화기를 보안관 옆구리에 총 차듯이 바지 주머니에 항상 지니고 다녔다. 십 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더니. 2000년대에 유학생활을 할 때에는 <스카이프(Skype)>로 해드셋을 착용하고 한국에 있는 연인과 통화를 하는 지인들의 모습을 종종 봐왔었다. 내가 브라질에 머무를 당시 군대에 입대한 아주 오래 전 남자 친구는 선불제 국제 전화카드를 구입하여 군부대 공중전화 박스에 매달려 발신자 부담의 값비싼 통신비를 지불하기도 했다. 그랬던 내게 해외 생활에서 인터넷 전화기 사용과 통화 어플리케이션의 등장은 새삼 내가 나이를 먹었음을 일러주었다. 


결전의 인터넷 설치일이 다가왔다. 한껏 부푼 가슴을 안고 새벽부터 열심히 생활 독일어 학습을 하며 집 밖을 떠나지 않았다. 분명 오전 9시 약속 이었는데, 9시가 되어도 그리고 10시, 11시가 되어도 설치 기사님의 반가운 초인종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O2(오투) 홈페이지 고객센터에 글을 남겼다. 예약 번호와 주소, 이름을 쓰고 예약 기사가 오지 않았으니 제발 인터넷 설치를 해주길 바란다고 억양이 강했는지 거만했는지도 모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독일어를 대동했다. 그리고 얼마 뒤 고객센터에서 회신이 왔다.

 

‘인터넷 설치기사가 방문한 시각에 당신이 부재중이어서 인터넷 설치를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예약 일정을 잡아야 합니다.’


정말 가만히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팍’ 때려 맞은 기분이 이런 거겠지. 초인의 마음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예약 일정을 다시 잡았고, 나는 계속해서 인내를 몸과 마음에 새기며 사람이 되어갔다. 처음 인터넷 설치를 신청한 일자에서 정확히 100일만에무사히 인터넷이라는 문화 혁명을 우리 집에 들일 수 있었다. 백일 째 되던 날, 나는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싶을 정도의 행위를 보였다. 책 한 권과 진하게 내린 커피 한 잔을 들고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인 현관 앞에 나가 벤치에 앉았다. 약속시간인 오전 9시가 다가오니 머리털이 곤두서고 집 앞 잔디밭에 야생 토끼가 지나치며 들리는 ‘사각사각’ 소리에도 고개를 돌려댔다. 아홉 시가 되자 마자 멀리서 ‘부르릉’지나가는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제발’


하얀 바탕에 ‘텔레콤(Telekom)’이라 통신사 로고가 박힌 승용차 한대가 집 앞 주차장에 멈춰 섰다. 


‘제발, 제발’


풍채 든든한 전형적인 독일인 느낌의 아저씨 한 분이 노트북이 세 대 정도 들었을법한 두툼한 검정 가방을 들고 내리셨다.


‘안되겠다.’ 


도저히 기다릴 수 없는 불안함과 조급함으로, 나는 차에서 내리자 마자 바지 뒷주머니에서수첩을 꺼내 몇 장의 종이를 뒤적거리시는 아저씨에게 달려갔다. 내 이름과 집주소를 댔더니, 다행히 마침 확인한 이름이었다며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사십 분쯤 지났을까. 설치 기사님께서 나의 랩톱의 무선인터넷까지 손수 확인해주셨다.





‘빠르다’


별다방에서 상상할 수 없는, 웬만한 독일의 사무실에나 깔려 있음 직한 무선인터넷 속도를 드디어 집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백일의 기다림으로 달콤한 인터넷의 속도를 갖게 되니 뿌듯해졌다. 독일의 디지털 제품은 보통의 주방용품이나 가전제품보다 가격대가 있어서 공유기를 구매하는데 자그마치 60유로를 지불해야 했다. 직접겪어봐야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지 않는가. 이렇게 해서 집을 구할 때는 사전에 인터넷이 설치되어 있는지를 확인해야한다는 깨알 같은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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