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뒤쪽에서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눈꺼풀이 무거워 쩔쩔매던 나는 잠이 확 깼다. 아이들도 소리나는 쪽으을 돌아보고 있었다.
한 아이가 책상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먼저 책상 위로 튀어 올라가 앉은 그 아이가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졸리운 교실이 뒤흔들렸다. 아이들은 마치 일어서는 도미노처럼 책상 위로 올라섰다. 어떤 아이는 책상 위에 올라갔으나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키 작은 내가 가장 늦게 책상 위로 올라서기까지 순식간이었다. 우다닥 우다당 우당탕탕. 난리였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하면서 느릿하게 움직인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모두 책상 위로 올라갔다.
칠판 가득 판서를 하며 수학 문제를 풀고 계시던 수학 선생님은 아이들을 말리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혼이 빠진 모습이었다. 분필을 쥔 손을 칠판에 댄 채로 아이들을 돌아보셨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아무 말도 못 하시다 입을 여셨다.
"자자, 여러분 이제 내려와 앉읍시다. 무슨 일이지요?"
아이들은 내려오기를 주저하면서 올라갈 때와는 달리 느리게 움직였다.
"무슨 일인지 누가 말해보시오."
선생님은 고향이 이북이셨다. 조금 남은 이북식 억양으로 느릿하게 말씀을 하셔서 설명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오셨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사신다는 얘기도 있었다. 가족 이야기를 한 번도 하신 적이 없고, 수업시간에 수학 이야기 외는 일체 다른 이야기가 없으신 정년퇴직이 1년 남았다는 선생님은 할아버지였다. 14살짜리 중학생에게 나이 60은 적은 나이가 아니었으나,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반말을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선생님을 어려워도 하지 않았지만 버릇없이 굴지도 않았다. 선생님도 우리를 거칠게 대하지 않으셨다. 선생님들마다 출석부와 막대를 들고 다니셨는데, 수학 선생님은 교과서만 들고 교실에 들어오셨다. 빠진 사람 없습니까, 묻고는 바로 수업을 했다. 재미없는 분이셨으나 이제 생각하면 매우 성실했던 분 같다. 제일 먼저 책상 위로 올라갔던 아이가 일어섰다.
"생쥐다! 했습니다."
교실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럼 뭐야, 고작 생쥐 때문에 이 난리를 친 거야.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교실 안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당시 교실에는 쥐가 들나들었다. 일제 시대에 지었다는 학교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아서 움직이지 않아도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게 햇빛에 보였다. 요새야 먼지다, 미세먼지다 하며 불안해 하지만 그때는 먼지가 눈에 보이는데도 그게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룻바닥은 나무판과 나무판을 이어 붙인 틈새가 커서 연필이 떨어져 운이 나쁘게 그리로 굴러떨어지는 일도 종종 생겼다.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들여다보면 아이들이 떨어뜨렸을 연필이며 각종 학용품이 먼지와 함께 수북할 거다. 교실 문도 부실하기 짝이 없어서 문을 여닫다 문짝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고, 쥐들이 갉아내서 쥐구멍을 만들고 드나들었다. 학교라는 건물은 으레 그런 줄 알았다. 국민학교도 그랬고 언젠가 큰언니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가 본 적이 있는데 고등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다. 내가 아는 공공건물은 모두 그렇게 부실했으나 부실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선생님은 다시 아이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예의 느리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나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해방도 겪었고, 6.25 동란도 겪었습니다. 4.19 의거와 5.16 군사혁명( 그때는 혁명이라고 했다)도 겪었지만 오늘처럼 놀란 적은 없었습니다."
오래 전 일이다. 살다 살다 별일 다 겪었다고 말했던 그 친구. 홀로 지내시는 어머니가 있는 친구는 코로나 이전보다 더 자주 어머니를 뵈러 간다고 한다. 불안해하셔서라고 했다. 비교적 건강하셔서 여행사에서 꾸린 여행 팀에 어울려 다른 나라 여행도 다니시고 동네 여기저기 열리는 교육도 들으러 다니고 하셨는데.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온 게 어머니 불안에 방아쇠를 당긴 것 같다며 걱정했다.
"또 왔나 보다. 누가 또 걸렸다고. 이번엔 어디라니?"
하루에도 몇 번씩 오는 재난 문자도 어머니의 불안을 부추기는 것 같다고 했다. 친구의 어머니도 6.25를 얘기하시며 그때도 무서웠지만 지금처럼 무섭지는 않았다고 하신단다. 마스크를 쓰고 살살 다니셔도 된다 말씀드려도 나가는 것을 불편해하시며 하루 종일 텔레비전 뉴스만 본다고 한다.
"사람들이 막 죽어 나간다며? 의사들도 큰일이라고 걱정하더라."
어느 페친은 '정리와 수납 강의 들으러 갔다가 동영상 제작과 실습 수강 신청을 하고 왔다'며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라고 고민했다. 그의 고민은 내 고민이기도 하다.
올초 열기로 했던 강의가 거듭 연기되다 이제 열릴 것 같다. 그동안 연기만 한 게 아니라 강의 방법도 같이 바뀌었다. 대면강의에서 대면으로 하되 참가자를 절반씩 나누어하기로 했다가 다시 연기되더니 이번에 결정된 방법은 온라인 강의이다. 카메라에게 강의하고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는 강의를 하게 될 것 같다. 그것도 또 바뀔지 모르지만.
나도 두렵다. 준비 없이 맞은 코로나 시국, 누구나 같은 처지라지라고 말들 하지만. 일상이 두려운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위험한 줄 알지만 어쩔 수없었다'는 물류센터 일용직 노동자들. 퇴직금으로 인생 2막을 열려고 마련한 반찬가게, 음식이 팔리지 않고 부패해나가는 것을 대책없이 바라보는 K.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고 언제까지 아이를 혼자 집에 둘 수만도 없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워킹맘. 사람들의 두려움은 배고픔이 아니라 불안한 미래다. (202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