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참고서를 빌려간 그 애가 한 것은
코로나 일기
책상에 앉자마자 공부가 되셔요?
저는 책상에 앉아 무슨 일을 좀 하려면 예열이 필요해요. 예열작업으로 주로 하는 것은 필사입니다.
필사 좀 하고나면 집중도 되고 머리도 공부하는 태세로 준비가 됩니다. 요새는 코로나 덕분에 바깥 일이 줄고 집 안에서 처리하는 일이 많아졌어요. 그런 중에는 제 일을 하기 위한 공부도 있구요. 공부, 잘하는 비법이 있을까요?
공부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들의 관심이 줄지 않아요.
세상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 몇 가지 안에 들어가는 게 공부잘하기라고들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공부 잘한 가족 이야기, 눈에 띄지요.
중졸 아버지가 게임중독 아들을 가르쳐 서울대(명문대보다 서울대 해야 더 끌리지요?)에 보낸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이름은 노태권이라는- 이미 2014년에 신문에 났던 사람이더라구요.
최근, 적어도 올해 초 이야기인 줄로 알고 읽었어요. 다 읽고 나서 오래된 이야기라는 걸 발견했어요.
한 번은 페친이 올린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길게 댓글을 달았는데 알고 보니 '지난해 오늘 있었던 일'이라는 겁니다.
지난해 것을 읽고 좋아요 눌렀다 해서 안 될 건 없지만, 그래도 그렇잖아요?
저는 가끔 시도 때도 알기 어려운 읽을 것들 때문에 날짜를 착각하기도 해요. 뒤늦게 누른 '좋아요'는 얼마나 웃겨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세 남자의 뒤엔 누군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어야 하겠지요?
맞아요. 아내라 불리는 어머니! (난 좀 꼬인 것 같아요. 재수 없어요. 여자의 희생!)
아내의 뒷바라지가 그 남자의 거름이 되었다네요.
기사를 보면 나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이 남자를 고쳐야겠다 해서 결혼도 했다는데,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닙니다. 당사자 스스로 고치는 것만 있을 뿐.
각설하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아버지의 공부법입니다.
분명 대단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런 사람이 되기까지의 스토리텔링은 말하지 않을랍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각성해서 죽을 것처럼 힘든 고비를 넘는, 피와 땀과 바꾼 승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서요.
이 이야기가 감동적이려면 주인공이 무수한 고난을 넘는 시퀀스를 필요로 해요.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는 생략하려구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는 특별하기만 하거든요.
아버지의 공부는 아들의 무시 때문이었고, 아들의 공부는 게임중독 때문이래요. 서울대가 목표가 아니라. 그점은 중요해요. 서울대라는 관을 목표로 하는 공부는 미리 질릴 걸요.
이 아버지의 공부 방법은 아주 단순해요.
책 초서하기예요. 글을 읽고 중요하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요약해서 적는 것을 초서라고 말해.
이 아버지는 아내가 해준 초서로 공부했대요.
난독증 때문에 읽기도 힘들었던 겁니다. 아내가 교재를 큰 글씨로 초서해준 걸 들고 다니면서 공부했다네요.
졸릴 때는 벽에 대자보처럼 초서한 것을 붙여놓고 서서 공부했대요.
그가 공부를 잘했다는데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실력을 알아보는 방법으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시험이잖아요.
어느 해인지, 적어도 2014년 이전의 수능 모의고사에서 한 개만 틀렸대요.
아내가 시험봤다면 만점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초서하고 필사한 사람이 아내니까요.
아버지가 달라지니까 아들도 달라진 것 같아요.
"너 왜 그러냐, 그렇게 살면 아무것도 못 된다, 어쩌려구 그러냐,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다 말뿐이잖아요. 말로는 아무것도 못해요. '해야' 하는 거지요.
아무튼 '초서'가 '시험공부의 다'라는 얘기가 이렇게 길어졌어요.
공부할 때 초서와 필사를 한 친구가 있었어요. 공부를 참 잘했던 친구. 오래전 이야기니까, 지금은 더 이상 시험공부는 하지 않고 있으니까 '있었었다'고 말합니다.
형제가 여럿인 나는 형들이 쓰던 참고서를 물려받아서 썼어요. 참고서는 언제든 그 자리에 있는 거고, 내 꺼니까
시간에 쫓기면서 볼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못 본 책도 많습니다.
그책의 임자는 따로 있었어요. 옆집에 나랑 같은 학년인 학생이에요. 그애는 나와는 반대로 맏이였어요. 그애가 방학 때면 내가 버려둔 참고서를 늘 빌려 갔거든요.
(아, 나는 이야기하다 딴 데로 잘 갑니다. 그애 아버지가 이발사여서 머리를 깎으러 걔네 아버지 이발소로 가서 머리 깎고 안채로 들어가 친구 어머니가 깎아 준 참외도 먹고 놀기도 했어요. 이발소엔 밀레의 만종이 걸려 있었던 기억이 선명해요. 단발머리 시절 이발소에 걸린 만종에서 다른 무엇도 아닌 해 질 녘의 쓸쓸함을 보고는 했어요. 그땐 여자애들도 이발소에 가서 단발머리를 깎았어요. 요즘은 남자들도 미용실에 와서 머리 자르지만. 여성성 내지는 여성의 특성이 더 요구되는 시대라는 걸 머리 깎는 장소에서도 보여주는 것 같고.)
그애는 방학이면 우리집에 와서 참고서, 특히 자습서를 빌려 갔어요. 수학과 영어 자습서.
그애는 그걸 필사했어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책 살 돈이 없어서였다 고만 생각합니다. 참고서가 아까워서 혹은 그애가 공부 잘하는 걸 시기했다거나 해서 안 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함께 다닌 중학교에서 그애는 늘 전교 1등이었어요. 모두에게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인정받았고, 나도 그애는 머리 좋은 애라고 여겼지요. 어떤 날 수학 선생님이 못 푸는 문제를 이 친구가 풀기도 했어요. 그런 날 뒤에서 선생님 흉을 좀 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애가 대단하다는 것에 방점을 둔 이야기를 했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애는 남고로 나는 여고로 갈리고, 여전히 전교 1등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했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구요. 그애는 공부 잘하는 애였으니까. 마침내 그애가 서울 명문대 합격했다고 걔네 학교 교문에 플래카드가 걸리고 했을 때 나는 전기에서 떨어져 후기 대학을 간신히 붙었어요. 그 후로 우리들의 일상은 점점 더 멀어져 절기에 한 번씩 소식이나 듣는 사이가 되었어요. 그애는 대학을 마치기 전에 헤리티지 재단(지금은 헷갈려요, 풀브라이트 장학금인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갔구요. 저는 졸업하고 교단에 좀 섰다가 ---.
이따금 그애는 말했어요.
"다 네 덕이다. 네가 빌려준 책 덕분이다. 나는 정말 죽어라 하고 필사했어. 빨리 돌려주어야 했으니까. 필사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나에게 맞는 참고서도 만들 수 있겠더라고." (2020. 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