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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Feb 20. 2021

[독서모임]다시 버지니아 울프를 읽었다

화요일 밤에 랜선으로 모여 책 읽는 사람들

나이 예순에 버지니아 울프를 다시 읽었다.


메뉴를 정한 날은 냉장고 문을 열고 오래 들여다 보지 않는다. 필요한 것을 척척 꺼내서 바로 조리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런 날은 재료가 많고 적음이 크게 문제 되지도 않는다. 있는 재료로 시간을 크게 들이지 않고 식탁 차린다. 손이 가는 음식을 만들어도 힘들지 않다. 그러나 무얼 할지 메뉴를 정하지 않은 날은 냉장고에 재료가 많아도 결정하지 못하고 생각만 많아진다. 봄동 된장국을 끓일까, 하지만 엊그제 먹었는데? 맛있는 것도 드문드문 먹어야 맛이 있지. 소고기뭇국을 끓일까? 설에 먹은 탕국도 소고기뭇국에 두부만 더 넣은 거잖아. 달래 된장찌개를 끓일까, 달래 된장찌개라고 된장과 달래만 넣을 수는 없잖아, 넣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그런 날은 생각만으로도 이미 피곤하다.


독서모임 일지를 못 쓴 지 여러 날이 지났다. 냉장고 앞에 서서 갈등하는 것처럼 무얼 쓸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하니 글은 안 써지고 생각만 많았다.



2월은 어정쩡하게 번째 주가 돼서야 만났다. 회원들은 피로해 했고, 중간에 설 연휴도 끼어 있었던 것도 원인이다. 시간이 많으니까 함께 읽기로 한 책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렸다. 그보다 평소에 읽으려고 쌓아두었던 책 몇 권을 침대맡에도 한 권, 식탁에도 한 권, 책상 위에서 한 권 늘어놓고 들며나며 읽었다. 그런 책 중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도 있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이지만 다시 읽었다. 예순이 아니라 팔순에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할 리 없지만 다시 읽는 내내 어쩐지 늦은 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페미니즘 비평서라는 이 책. 뻔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진작에 더 잘 읽었더라면 나는 달라졌을까?


<자기만의 방>을 다시 읽게 된 데는 회원 윤지(가명)때문이다. 그녀도 예외없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시대를 보내라 고생 중이다. 내로라하는 기업에 다녔던 그녀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사표를 냈다. 어린이집 다닐 때보다 보육이 더 어려워서였다. 코로나는 이 상황을 더 심각하게 했다. 아이는 온라인으로 교육받고, 온라인으로 방학식하는 등, 대면 사회활동은 집에서 가족하고만 가능한 듯한 날을 보낸다.

남편의 재택근무는 그녀를 더욱 쉴 틈없게 했다. 하루종일 북적대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아이를 위해 책을 고르고 함께 읽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만을 위한 시간 내기가 그중 가장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 여자들은, 아내는, 엄마는 자신을 위한 일을 하겠다고 가족을 위한 일을 팽개치지 못한다. 심지어 소득이 있는 일을 할 때도 이 순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남편과 아이들이 하루짜리 여행을 갔는데, 자신은 일부러 빠졌다고 했다. 하루만이라도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쓰기 위해서.




혼자 있던 날 윤지 씨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다시 읽었다고 했다. 영문과에 다닐 때 어쩔 수 없이 읽었던 책이라며,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마치 100년의 시간을 건너 뛰어 다가온 버지니아 울프가 여학생이 가득한 강당의 연단에 서서 눈을 맞추며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쏙쏙 들어왔었다고 했다.


“‘여성이 픽션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돈이 필요하다’는 울프의 말은 실현되었지만, 모든 여성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러분은 돈을 벌어라. 열심히 살어라, 열심히 공부해라. 지금 그렇게 나른하게 엎드려 있을 때가 아니다.” 초여름, 수업보다는 강의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신록에 마음이 가 있어 강의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교수의 말이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리면 동시에 떠오른다고 했다.


“다행히 딸들의 교육을 차별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고도 교수는 울프에 접신이라도 한 듯 많은 말을 쏟았는데, 그건 여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라기 보다 자신에게 하는 다짐의 말처럼 들렸다고 했다. 윤지 씨도 그날 불현 듯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며 많은 말을 했다.


이번 주 읽기로 한 책은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이었다.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란다.” 남편을 어이없게 잃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만큼은 자신이 겪은 불행을 겪지 않게 하고 싶어 서울에서 신문물과 신교육을 가르치려고 한다. 딸을 신여성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은 엄마의 사명감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엄마의 염원대로 ‘문안의 신여성’이 되지 못한다. 결혼을 하고 5남매를 둔 평범한 주부로 산다.



신여성이란 무엇인가?


몇 년 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신여성 도착하다>는 제하의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에서 는 ‘신여성’을 여성에 대한 사회정치적, 제도적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근대기의 새로운 교양을 쌓은 여성상이라고 정의했다. 21세기 여성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경제적 자립이 필수 아닐까? 그리하여 자기를 지켜가며 온전히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장성한 딸의 성장기에, 지금은, 나는 어떤 엄마였을까?


자식을 신여성으로 키우고자 서울로 데려와 딸만큼은 ‘문안의 신여성’으로 키우고자 했던 엄마와 나는 얼마나 다른가. 현저동 산꼭대기에 박은 말뚝이 엄마와 가족을 지켜주기도 했지만 그 말뚝에 매여 정작 소설 속 ‘나’를 구여성도 신여성도 될 수 없도록 붙잡은 엄마에서 나는 얼마나 나아간 걸까? 또 나는 내 삶을 온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얼마나?


나이 예순에 <자기만의 방>을 다시 읽었다.






#쓰고_싸우고_살아남다/장영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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