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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Feb 25. 2021

[독서모임]독서기억은 소리와 냄새와 빛깔로 저장된다

화요일밤에 랜선으로 모여 책읽는 사람들

대문 앞에 내놓은 나무걸상에 앉아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국민학교라고 써놓고 돌아서면 한글 프로그램이 어느새 초등학교라고 바꾸어 버리지만. 여름 해가 지고 있었다. 습습한 공기를 깔고 미루나무 긴 그림자가 마당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저녘놀로 온 하늘이 붉어지는데 오직 비행운만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보통은 어머니라고 쓰지만 이 글에서는 엄마라고 써야 어울릴 것 같다)는 칼국수를 끓이고 계셨다. 부엌에서 감자와 호박을 넣어 끓이는 국물 냄새가 집안 그득했다. 대청마루에 큰 보자기를 깔고 칼국수 반죽을 하던 엄마는 밀가루 희고 고운 게 분같다며 칭찬하셨다. 치대면 치댈수록 고와지고 끈기도 강해진다며 엄마는 밀가루 반죽을 오래 하셨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엄마가 분처럼 곱다던 밀가루는 미제였다. 어른들은 미제라면 양잿물도 먼저 마시러 들 거라며 미국 것을 동경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오시고 있었다. 손에는 신문지로 둘둘 말아 노끈으로 묶은 것을 들고. 낯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군지 알아보기 힘든 일명 개와 늑대의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단박에 아버지인 줄 알아봤다. 걸음걸이만 봐도, 모자만 봐도 아버지의 실루엣만 봐도 나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또렷해지는 아버지를 향해서 큰 소리로 ‘아부지’ 를 부르고, 부엌을 향해 ‘아부지 오셔요!’ 엄마께는 이제 칼국수를 국물에 넣을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드렸다. 칼국수는 먹기 직전에 끓여야 한다. 나는 배고픈 걸 참지 못하는 편인데 아버지가 그러셨다. 그러므로 엄마가 칼국수를 끓는 물에 넣는 시간은 정말 중요했다. 자칫 시간을 잘못 맞추어 국수가 불어서도 안 되고, 아버지를 기다리게 해서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상하셨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머리를 쓱 거칠게 만지시며 ‘책 읽는구나? 무슨 책이냐?’ 하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책 읽는 자식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만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부러 부모님 들으시라고 크게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어려운 것도 읽는구나 하셨지 어려우니 읽지마라 하시지도 않았다. 나는 멋도 모르고 읽었다.


그날 내가 읽은 책은 영국 시인 바이런의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였다. 읽을 거리가 드문 그 시절 내가 읽은 책은 어린 나에게는 터무니 없는 것들이 많았다. 권장도서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내게 알맞은 책이라고 한다면 교과서 정도였다. 교과서는 싱거웠다. 내 위로 형들이 여럿인 나는 형들이 받아온 교과서를 형들보다 먼저 읽기도 했었으니까. 그런 중에는 이미 성인이 된 큰오빠가 읽던 연애소설도 있었고,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같은 형들이 공부하느라 사놓은 책도 있었다. 나는 우리집 신문의 애독자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퇴근을 고대하는 아이였는데, 퇴근길에 들고 오시는, 신문에 연재되는 소설 읽는 재미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나의 독서는 대중이 없었다.


잘하는 독서는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독서법일까? 정답이 따로 있을 리 없다. 독서야말로 사적이고 개별적이어서 몇 가지 훌륭한 독서법이 모든 이에게 다 좋다고 할 수도 없다. 한가지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은 책 읽는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즐겁게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독서에 얽힌 나쁜 기억이 독서와 멀어지게 한다. 양서를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즐거운 기억이 독서인생으로 이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짜리한데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가 가당키나 한가? 책을 읽은 게 아니라 기호를 읽은 것 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날 그 시간을 통째로 기억한다. 어두워지는 길을 오시던 아버지 모습, 그 손에 들린 신문, 부엌에서 식욕을 자극하던 칼국수 냄새, 습습한 저녁 기운, 아버지 기침소리, 부모님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던 소리,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책, 나무 걸상에 앉아 어두워서 더이상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안타까움---.


어린이 손에 들린 선정적인 도서로 어린이보다 어른이 문제를 만든다. 호들갑스럽게 대할 때 아이에게는 조금 이상했던 책이 호들갑스러워진다. 아이에게 책을 읽힐 때 알맞은 때에 알맞은 책을 읽게 하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지나치게 촘촘하게 선을 그어 구분할 필요는 없다. 아이들은 관심 없는 것은 읽으려 들지도 않지만 읽는다 해도 의미없이 흘려보낸다. 독서는 그렇다.


독서에 대한 기억은 한편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림 속에는 소리와 냄새와 기분까지 들어 있어 생생하다. 매주 화요일 밤에 만나서 하는 책 이야기, 심지어 그 책을 몇 번째 읽었더라 빠른 속도로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분위기만큼은 생생하다. 이야기하다 누가 눈물을 글썽였는지, 어떤 지점에서 누가 목소리를 높였었는지, 훗날 이 시간을 회고하게 된다면 그때는 웃지 않을까?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큰 사회다. 읽을 거리도 많다. 많아서 스트레스다. 읽어야 한다고 하고, 읽을 게 많으니 더 안 읽힌다.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얻는 게 목적이 되면 더 읽기 힘들어 진다. 나는 회원들에게 적어도 이 독서모임에서는 읽는 게 일이 되지 않게 하자고 말한다. 한창 어린 아이를 키우는 이들이고, 나이 든 부모가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지는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다. 일을 벌이지 않아도 안팎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다. 화요일밤 우리는 랜선으로 모여 책모임을 한다. 거기서는 세상 사는 이야기는 접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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