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 탱고
크라스나호르카이 라슬로의 『사탄탱고』를 읽기는 진흙탕을 걷는 것 같다. 발이 무겁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겁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멈출 수가 없다.
이 소설의 문장들은 끝날 줄 모른다. 한 문장이 한 페이지를 넘고, 두 페이지를 넘고, 때로는 서너 페이지를 계속 이어진다. 쉼표와 접속사가 문장을 붙들고 늘어지고, 묘사가 겹쳐지고, 생각이 맴돈다. 마침표가 나올 때쯤이면 이미 숨이 차 있다.
처음에는 답답했다. 왜 이렇게 써야 하는가. 이 문장을 끊으면 안 되는가. 그런데 읽다 보니 이해가 될 듯하다. 이 문장들은 끊을 수 없겠구나.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삶처럼.
헝가리의 어느 황폐한 마을. 소련 체제가 무너진 후의 폐허가 배경이다.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떠날 수도 없는 사람들, 남아 있을 수도 없는 곳인데.
비가 내린다. 계속 내린다. 진흙이 모든 것을 뒤덮는다. 사람들은 술에 취하고, 음모를 꾸미고, 서로를 배신한다. 그러면서 구원자를 기다린다. 이리미야스라는 남자를, 구원을, 혹은 그 무엇을.
크라스나호르카이는 이 정체된 시간을 긴 문장으로 표현한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 문장도 끝나지 않는다. 읽는 동안 나는 그 느린 시간 속에 갇히고 만다.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마저 느려진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고, 진흙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으며, 사람들은 그저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그저 기다렸다, 창밖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얼굴을 훔쳐보며..."
이런 식으로 문장은 이어진다. 쉼표 뒤에 또 쉼표가 온다. 절망 뒤에 또 절망이 온다.
제목의 '탱고'는 춤의 리듬을 가리킨다. 탱고는 앞으로 두 걸음, 뒤로 한 걸음. 전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제자리로 오는 춤이다. 소설의 구조도 그렇다. 12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앞으로 갔다가 뒤로 돌아온다. 같은 사건을 다른 시점에서 반복한다.
희망이 보이는가 싶으면 무너진다. 이리미야스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한다. 사람들은 믿는다. 그리고 배신당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여러 번 반복된 패턴이다.
가장 잔인한 장면은 어린 소녀 에스티의 죽음이다. 학대받고 외면당한 아이가 고양이를 괴롭히고, 독약을 마시고, 폐허가 된 건물에서 죽어간다. 크라스나호르카이는 이 장면을 몇십 페이지에 걸쳐 묘사한다. 느리게, 자세하게, 고통스러울 만큼 천천히.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았고,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았으며, 비는 계속 내렸고, 그녀는 그곳에 누워 있었다, 작고 차가운 몸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긴 문장 때문만이 아니다. 이 소설에는 희망이 없다. 카타르시스가 없다. 구원이 없다. 있는 것은 끝없는 순환, 반복되는 절망, 빠져나갈 수 없는 진흙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아름답다. 절망을 이토록 정직하게, 이토록 집요하게 그려낸 문장들이 주는 힘이 있다. 크라스나호르카이는 거짓 위안을 주지 않는다. 그는 독자를 그 진흙탕 속으로 데려가 함께 걷게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소설을 벨라 타르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7시간 넘는 흑백 영화. 긴 롱테이크, 느린 카메라 이동, 끝없이 내리는 비. 영화를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것만큼 고통스럽다는 평이다. 그만큼 잊을 수 없다는 뜻일 거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 의사는 창문을 판자로 막는다. 하나씩, 천천히. 빛이 사라진다. 어둠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는 쓴다. "지금부터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사탄탱고』가 제시하는 유일한 해법인지도 모른다. 보지 않기. 외면하기.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기. 절망적이다. 그러나 정직하다.
많은 소설들은 아무리 어두운 이야기라도 끝에 가서 희망의 실마리를 놓아둔다. "그래도 내일은 나아질 거야."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독자를 편안하게 보내주려는 배려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거짓말이기도 하다.
크라스나호르카이는 그런 거짓 위안을 주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세계에는 출구가 없다. 체제가 무너진 후의 폐허, 가난, 배신, 무력감. 이리미야스는 구원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다. 공동체는 환상이다. 노력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것이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책을 덮고 나서도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위로가 있다. 작가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것, 독자를 어린아이 취급하며 달래지 않았다는 것.
"네 삶이 힘든 게 네 탓이 아니야. 때로는 정말로 출구가 없어. 그 절망을 인정해도 괜찮아." 그가 말하지 않은 말들이 들리는 것 같다.
정직함은 때로 잔인하다. 하지만 거짓 희망보다 낫다. 크라스나호르카이는 독자에게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용기를 가진 독자에게만 이 소설은 진짜 의미를 드러낸다.
이 소설을 권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읽고 나면 잊히지 않는다. 그 느린 문장들이, 그 끝없는 비가, 그 진흙투성이 마을이 계속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무거운 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