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챙 Dec 08. 2023

이제부턴 아내를 저가항공에 태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얼마 전, 형/나/동생 이렇게 삼 형제가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이제 연말도 다가오는데 셋이서 여행이나 가는 건 어떠냐며 동생이 말을 꺼냈다.


형은 나처럼 조금 귀찮은 눈치였지만 늦둥이 동생은 꽤나 열정적으로 우리를 설득했다. 호텔은 자기가 모은 포인트로 잡으면 되고, 국내선 비행기 티켓은 한 사람에 50달러(6만 원) 정도밖에 안 한다면서.


결국 동생의 설득에 오랜만에 삼 형제가 3박 4일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슬슬 연말도 다가오고, 얼마 전 승진한 형도 축하할 겸, 셋 중 혼자 유부남인 나도 연말에 아내와 떨어져 있어야 할 상황이니 타이밍도 적절했다.


그래, 까짓 거 여행 가자!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동생은 바로 호텔을 예약했고, 나는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려 구글 검색을 시작했다.


동생 말대로 가장 저렴한 티켓은 한 사람에 5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공항 가는 택시비보다 싼 비행기 티켓이라니. 조금 못 미더웠지만 어차피 남자 셋이서 가는 여행, 티켓에 돈을 아끼고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티켓 3장을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하려는데 확인사항이 다소 생소했다.


"공항 카운터에서 직원과 상담하시면 추가 비용 20달러가 청구됩니다."


"기내에 작은 핸드백보다 큰 가방을 들고 탑승하실 경우 추가 비용이 청구됩니다."


"티켓 예매 후 상담원과 예약 관련 통화를 하실 경우 추가 비용이 청구됩니다."


그 외에도 추가 비용을 내지 않으면 좌석 지정불가, 공항 도착 전 온라인 체크인 불가, 비행 중 음료나 스낵은 전혀 제공되지 않으며, 어떤 숨을 쉬는 직원과의 대화도 불가했다. 역시 괜히 싼 게 아니었다. 


항공사의 인정머리 없는 조항에 그냥 돈을 더 내고 다른 항공사를 알아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우리 셋 모두 군필이라 필요한 최소한의 서비스는 군인 혜택으로 추가 비용 없이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남자 셋이서 가는 3시간 남짓 짧은 비행. 가성비를 챙겨서 여행 중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먹기로 하고 티켓 3장을 결제했다.




저가항공 티켓을 결제를 하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항들이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결제 전에 미리 확실히 알려주기는 했네?


마음에 들지 않는 조항들이 한가득이었지만, 그래도 결제 전 눈에 띄게 큰 글씨로 어떤 서비스에 추가 비용이 붙을지 설명되어 있었다. 아주 자신 있게 "지금 구매하시는 티켓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제는 당신의 선택입니다"라고 말해주었다.


거짓말을 하지도, 과대포장도 없었다. 그저 솔직하게, "결제 전 알아두세요. 당신은 지금 저가항공을 구매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친 것 같았다.


그렇다. 제공하는 것이 없더라도 선택하기 전에 솔직하게 알려주면 괜찮다. 그러면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나중에 불편해도 납득할 수 있다. 불편함에 훅훅 짜증이 나긴 하더라도 결국 내 선택이니까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가 되는 건 포함된 서비스가 없다는 걸 확실히 알려주지 않는 것, 정말 나쁜 건 마치 포함된 것처럼 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거의 사기꾼 수준의 상습범 거짓말쟁이가 생각났다.


그건 바로 나다.




내가 처음부터 아내를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다.


사기결혼을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아내를 만나 가슴 벅찬 설렘으로 뿜어져 나오는 도파민에 취해 나를 과대평가했었을 뿐이다.


"풍족한 생활을 위해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고, 자아실현을 위해 일이 끝나면 부지런히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그 모든 걸 해내면서도 가정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가정적인 남편"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언제나 자존심 내세우지 않고 당신의 말을 들어주고, 살면서 어떤 무거운 짐이 생겨도 내가 대신 들어주고, 혹시 내게 당신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모습이 있다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변화할게요"라는 약속을 목숨같이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나는 내가 일등항공사 일등석 티켓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를 탑승하게 만들었는데, 막상 출항해 보니 안전하게 비행이나 할 수 있으려나 불안하게 만드는 최저가 항공인 것만 같다.


하지만 회항할 생각은 없고, 환불해 드릴 마음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저가항공에 태우고 싶지는 않으니, 계속 비행하며 일등항공사로 거듭나는 수밖에.




결혼하고 나니 속은 것만 같으셨죠. 무제한 코스요리 포함된 일등석인 줄 알았는데 땅콩·콜라도 안 나와서 사기당한 것만 같으셨죠.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건 아주 긴 비행이라 셰프가 아주 근사한 요리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대접하도록 할게요.


그러니 저가항공은 군필 남자끼리 여행 갈 때나 이용하기로 하고, 소중한 당신은 항상 좋은 곳에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작은 기류에도 심하게 흔들리지만, 그래도 믿어주고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으로 함께 해줘서 고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