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3
'가장 기억에 남는 어렸을 때의 에피소드는 뭐야?'
'뭐 어떤 거 말이야?'
'왜 그런 거 있잖아.. 절대 잊지 못하는 거?'
'너무 많아서.. 생각을 좀 해봐야...'
'에이.. 없는 거 아냐?'
'아! 하나 생각났다!'
요즘 기억력이 좋아졌는지, 이상하게 어렸을 때의 일들이 속속 기억이 난다.
그런데, 기억이 또렷하게 나는 것들은 왜 죄다 흑역사들 뿐인지.. ㅎㅎ
그중에서도 정말 흑역사 오브 흑역사라고 할 만큼의 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으로 나는 동네에서 단번에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한동안은 너무 부끄러워서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던 사건이기도 했다.
내가 네 살쯤 되던 어느 늦은 가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 가족은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중화동의 어느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때는 아직 중랑구의 거의 모든 마을들이 개발이 안되었을 때라서 중화동 뒤쪽에는 낮은 산이 있었고, 그 산의 중턱에 큰 축사가 있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나는 그 당시에 감기에 걸렸다가 다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았었는데, 그날 아무 데도 나가지 말라는 엄마의 명령을 듣고 집에서 책을 보고 있었고, 엄마는 잠시 일을 하시러 나가셔서 집에 계시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나는 몇몇 동네 형들과 어울렸는데, 그 형들 중에 한 명은 우리가 세 들어 살고 있던 집주인의 아들이었고, 나는 종종 그 형 집에 올라가서 당시에 우리 집에는 없던 컬러텔레비전을 보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동네 형들이 와서 집 밖에서 나를 불렀고, 나는 엄마의 명령을 잊어버리고는 그 형들을 따라서 마을 뒤편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 위의 축사에는 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날따라 축사 바로 밖의 공터의 일부분 위에는 볏짚이 잔뜩 널려져 있었다. 형들은 공터에서 두 명씩 팀을 나누어 야구를 시작했고, 나의 역할은 바로 형들이 야구를 하는 동안에 공이 엄한 곳으로 날아가면 그 공을 주워오는 일명 볼보이의 역할이었다.
그렇게 한참 형들의 공을 주워주다가 어느 순간 야구공이 공터의 저쪽 구석까지 날아갔고,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곳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 순간 바로 몇 초 앞에 발생하게 될 큰 재난을 전혀 알지 못했고, 아무런 의심 없이 야구공이 날아간 공터의 제일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일단 공터는 매우 깨끗했고, 야구공이 날아간 부분의 땅 위에는 볏짚까지 두껍게 덮여 있었기 때문에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볏짚 위로 몸을 날리면서 야구공을 손에 잡았을 때, 내 다리는 이미 반쯤 그 볏짚 아래로 빠지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내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나의 몸은 아래로 더 빠져갔고 이상한 냄새가 자꾸 코를 찔러왔다. 알고 보니 그 공터의 볏짚 아래에는 소똥이 매우 두껍게 쌓여 있던 것이었고, 당시 네 살이던 나는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소똥의 늪 속으로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 형들도 아직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에 불과했고, 그 볏짚 아래에 소똥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더 아래로 빠져가는 나를 보고는 매우 당황해했다. 나는 형들에게 여기 소똥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 손에 잡은 야구공을 형들 쪽으로 던졌는데, 그중에서 우리 주인집 아들이었던 형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빨리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어른을 한 명 모셔 오겠다고 언덕 아래로 재빨리 뛰어내려 갔고 다른 세 명의 형들 중에서 두 명은 내가 내민 손을 잡아서 소똥무더기 밖으로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두 명의 형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몸은 점점 더 소똥 무더기 아래로 끊임없이 빠지고 있었고, 마침내 나를 꺼내주려고 했던 두 명의 형들도 엄마가 찾을 수도 있다는 핑계로 언덕을 내려가 버렸다. 나는 혼자 소똥 무더기에 몸이 반쯤 빠진 채로 울기 시작했고, 내가 점점 더 큰 소리로 울자 축사 안에서 나를 쳐다보던 소들도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이제는 해마저 뉘엿뉘엿 언덕 뒤로 넘어갈 무렵에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흐르는 눈물을 잠시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는데, 그곳에는 주인집 아들 형이 주인집 아줌마와 함께 뛰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고, 주인아줌마는 나를 보고 달려오시다가 사태를 파악하시고는 다시 내려가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 옆집에 살던 아저씨를 불러오셨는데, 그 아저씨의 손에는 밧줄과 수건이 들려 있었고, 나는 그 아저씨 덕분에 소똥 무더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소똥 무더기에서 빠져나오니 이제 내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에게 혼날 생각만 났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언덕을 내려오면서 주인집 형에게 제발 우리 엄마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형의 어머니께 말씀드려 달라고 했다. 그 형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지만, 이게 말을 하지 않는다고 알아채지 못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게 내 몸은 이미 허리 아래가 몽땅 다 똥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집에 가는 순간 모든 것은 다 탄로가 나게 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갔더니 이미 엄마는 손에 회초리를 들고 나를 마중 나와 계셨다. 멀리서 엄마의 모습이 보이자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엄마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엄마의 표정은 매우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내가 엄마의 바로 앞에 서자, 엄마는 상당히 당황하신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물었고, 나는 그때부터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바로 안으로 들어가셔서 큰 대야를 가지고 나오셨고, 바로 물을 받아서 나를 그 큰 대야에 담그셨다. 그날 나는 엄마한테 혼나지 않았다. 대신, 엄마는 내 피부가 벗겨질 만큼 나를 뽀득뽀득 씻겼고, 길에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엉덩이를 다 보았을 뿐이다.
지금도 가끔 시골에 가면 주변의 축사를 보며 당시의 일을 떠올리곤 한다.
#소똥
#똥무더기
#잊지못할추억
#흑역사
Q: 여러분은 어렸을 때 어떤 흑역사를 경험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