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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Mar 02. 2024

설거지의 미학

EP 28

경험상 설거지는 밥을 먹고 바로 해야 한다

'밥 먹고 나서 설거지를 바로 해?'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

'그럼, 언제 바로 하고, 언제 바로 안 하지?'

'뭔가, 컨디션이 좋으면 바로 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또?'

'흠.. 뭔가 바로 할 일이 있을 때?'



우리가 다 경험하고 있겠지만, 밥을 먹은 후에 곧바로 설거지를 하는 것은 습관이 되기 전에는 조금 힘들다.

아니, 힘들다고 하기보다는 귀찮다는 것이 더 맞는 말 같은데, 밥을 먹은 직후에는 배가 불러서 만족감이 뇌를 감싸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귀찮음이 모두 다 나에게로 오며, 그에 따라 일어나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 중에서 '설거지는 수저를 내려놓은 뒤 3분 안에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왜 그럴까?


사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이유는 잘 모른다. 하지만,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귀찮음은 또 다른 귀찮음을 생산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설거지를 하려고 생각했을 때 빨리 해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이고, 둘째, 사람은 자신이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행동을 빨리 함으로써 나의 의지(행동력)에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항상 "위가 막히면, 뇌가 막힌다"는 말을 들어왔는데,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나이가 점점 더 들어감에 따라서 아버지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나는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서 뇌의 활동과 소화작용의 관계에 대하여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밥을 먹을 때 뇌가 소화작용에 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과식을 해서 배가 부르게 되면 더욱 뇌가 소화작용을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가 많게 되기 때문에, 밥을 먹은 후 15분 정도 산책을 하거나 일어서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면 소화작용을 돕게 되어 뇌가 소비하는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밥을 먹은 직후에는 설거지 같이 일어서서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뇌에도 도움을 주며 동시에 위의 소화작용에도 도움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설거지보다는 산책이 훨씬 더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언가 시간을 정해두고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즉, 밥을 먹고 무언가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 있을 때는 과식을 안 하게 되며, 밥을 먹은 후에 설거지를 바로 할 뿐만 아니라, 밥을 먹고 나서도 식곤증이 오지 않는 경우를 많이 경험한다. 그러니까, 내가 집중해서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있으면, 내 뇌는 밥을 먹는 행위나 배가 부른 것을 모두 뛰어넘어 여전히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말이다.


사실, 나는 요즘 또다시 슬럼프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몇 년 전 내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결국에는 슬럼프로 이어지는 최악의 경험을 해야 했던 이유를 조금씩 다시 돌아보고 있는데, 내가 슬럼프에 빠져 있었지만 나 자신의 상태를 잘 몰랐던 지난 몇 년을 생각해 보면, 무언가 새로움이 없었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를 잘 몰랐고, 내가 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마지막으로는 사명이 결여된 채로 돈만을 쫓아서 그냥 일을 죽도록 반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다.


내가 제일 처음 영어강사라는 나의 직업에 대한 무료함에 빠진 것은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는데, 그때의 무료함을 이겨낼 수 있었던 방법은 "영어를 가르친다"는 큰 틀 속에서 내가 가르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바로, 영어시험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가르칠 수 있게 나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분야 안에서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렸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토플(TOEFL) 강사가 되어 나중에는 토플 학원을 운영하며 미국 유학을 목표로 삼은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고, 시간이 좀 더 지나서는 영어에 관련된 직업 중에서도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통역사를 목표로 공부하여 동시통역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작은 슬럼프들은 자꾸만 나를 찾아왔다. 내가 목표를 높여서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도중에는 순간순간 주어지는 행복과 좌절, 그리고 또다시 노력하는 나 자신의 모습 속에서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한 단계씩 목표를 이루고 나면 마음이 공허해지는 것은 매 한 가지였다.


코로나 이후에 학원을 접고 부모님 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겨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나는 부모님과 식사를 마치고 나면 설거지를 도맡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단지 그릇과 숟가락 등을 깨끗하게 씻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설거지를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무언가 설거지를 편하게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찾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인간은 문명을 개발했으며, 도구를 사용할 줄 아니까.. 설거지를 위해서 식기세척기를 사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나를 보시던 아버지께서는 "식기 세척기를 살 바에야 그냥 손으로 설거지를 하고 세척기 살 돈으로 다른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게 더 낫겠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식기 세척기를 사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다가 느끼게 된 것이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닦는 접시와 그릇들을 보면서 내 생각이 정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아니, 설거지 말고도 평소에 내가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하던 일들 속에서 나는 무언가 의미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몇 가지 특이한 루틴이 생겼는데, 설거지를 할 때는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고, 샤워를 할 때는 나의 일에 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화장실에서 큰 일을 치르고 있을 때는 정신적이고 영적(종교적인)인 깨달음이나 좋은 생각을 떠올리며 인생의 목적을 재정비하는 것이 그런 루틴들이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설거지를 하지만,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은 비워진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일이나 공부에 대한 어떤 걱정도 하지 않은 채로 나의 손을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마음속에는 여유가 생기고, 잠시 동안이나마 나의 두뇌는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오늘 해야할 남은 일들을 위한 재정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험을 한 뒤로부터 일상의 작은 것들, 또는 당연하게 하고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의 몇 가지 잘못된 습관들을 파악하고 고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서 몇 가지 나에게 도움이 되는 루틴들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일상

#작은것들

#루틴

#설거지

#당연한것들



Q: 여러분은 밥을 먹은 후에 바로 설거지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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