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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Mar 26. 2024

천사(?)를 보았다 - part 01

EP 07

일반적인 미국 고등학교 체육관 (출처: 구글)


내가 어느 정도 영어를 잘하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중학교 때 학교 농구부원 중에서도 농구를 좋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나는 유학을 가서도 학교 농구부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결국 농구부에 트라이아웃을 보고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당시에 이제 막 학교 캠퍼스 바로 밖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에서 한국과 싱가포르 등 다른 나라에서 온 동년배의 친구들 다섯 명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요일에도 학교 체육관에서 친구들과 농구 연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아파트로 이사를 한 첫 번째 일요일 아침, 나는 아침 일찍 농구공과 농구화를 챙겨서 학교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체육관에는 이미 에드몬드(Edmond)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여러 농구부 친구들도 와서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한참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체육관의 큰 문이 열리면서 열린 문 사이로 일요일 아침의 햇살이 체육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자, 갑자기 누구랄 것도 없이 그 열린 체육관 문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문 안으로 어떤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자 ESL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Mrs. 레이놀즈(Reynolds)의 딸인 베쓰(Beth)였다. 당시 나와 같은 15살이었던 그녀는 누가 봐도 귀여운 얼굴을 한 금발의 소녀였고, 우리 고등학교의 농구팀 다수의 남학생들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쯤 되면, 아무래도 그녀가 교장선생님의 딸이었기 때문에 남학생들이 다가가기를 꺼려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누가 봐도 귀여운 외모와 언제나 밝은 표정, 그리고 결정적으로 맑은 목소리와 치명적인 눈웃음을 가진 그녀에게 그 어떤 남학생도 접근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교장선생님인 베쓰의 어머니는 항상 상냥하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전형적인 미국인이셨는데, 그러한 엄마와는 달리 그녀의 아버지는 푸에블로(Pueblo: 미국 네이티브 인디언)의 피를 이어받은 백인이었고, 6.7피트(2미터 정도)가 넘는 키에 덩치가 산만한 사람이었으며, 언제나 인상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우리 학교 농구부에도 키가 큰 남학생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분에 비하면 정말 두꺼비 앞에 메뚜기를 가져다 놓은 격일 정도로 교장 선생님의 남편이 가진 외적인 카리스마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 텍사스에서 온 거대한 어른 남자를 의외의 장소에서 일대 일로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기독교 학교였고,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캠퍼스가 매우 넓었는데, 캠퍼스의 정중앙에는 "기도의 동산(The Garden of Prayer)"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도의 동산은 말 그대로 작은 언덕을 만들어 놓고 그 언덕을 중심으로 주위에 작은 연못과 여러 열대 식물들, 그리고 야자나무를 비롯한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심겨 있었는데, 나무들 아래마다 벤치가 놓여있었고 벤치들 옆에는 조명이 각각 설치되어 있어서 분위기가 조용하고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아침저녁마다 그곳에 와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원래, 기도의 동산은 밤 11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는 출입금지 구역이었는데, 학생 아파트로 이사를 온 지 며칠 후에, 나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놀다가, 문득 금지구역인 기도의 동산에 몰래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떠겠냐고 제안을 했고, 모두가 이미 기분이 업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선뜻 손전등을 챙겨 들고 아파트 문을 나섰다.


뺨을 타고 전해지는 선선한 밤공기에 우리는 기분이 더 좋아졌고, 열려 있는 학교 캠퍼스의 쪽문으로 들어가서 기도의 동산으로 이어지는 잔디밭 위를 마음껏 내달렸다. 사실, 내가 유학시절 가장 좋아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밤에 몰래 캠퍼스의 잔디밭 위를 뛰어다니고, 잔디밭 운동장 한가운데 누워서 하늘의 별을 보는 것이었는데,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더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서 기도의 동산에 도착한 우리 네 명은 굳게 잠겨 있는 기도의 동산의 낮은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고, 기도의 동산 한쪽에 있는 연못 주변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서 가져온 과자를 꺼내서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조명은 모두 꺼져 있었지만, 연못의 물레방아 위에는 물이 계속 흘렀기 때문에 천천히 돌아가면서 약간씩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리는 얼마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의 주제는 당연히(?) 당시의 남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화제였던 교장선생님의 딸로 넘어갔고, '왜 아무도 그녀에게 대시를 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과 '농구부 중에서 과연 누가 그녀의 아버지의 무서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등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성 답변들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앉아 있던 벤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렸고, 우리는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계속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계속 들어서 나는 이제 돌아갈 시간인 것 같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시간은 이미 새벽 두 시를 넘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일어나서 기도의 동산에서 나가려고 아까 들어올 때 넘어온 낮은 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나는 우리가 있던 곳의 반대편 벤치에서 뭔가가 천천히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그 뭔가는 어둠 속에서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손전등을 일제히 켜고 그쪽을 향해 비췄는데, 그 뭔가는 다름 아닌 우리가 벤치에 앉아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던 '텍사스의 거인', 베쓰(Beth)의 아버지였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 얼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거대한 남자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유학생활

#첫사랑

#농구부

#캠퍼스라이프

#미국고등학생

#인디언



Q: 지금까지 여러분을 가장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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