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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Sep 08. 2021

담쟁이덩굴

나는 덩굴식물이 좋다. 어떠한 벽도 넘어서는 가냘프고 하찮은 몸뚱이에 왠지 모를 벅참을 느낀다. 악착같이 벽을 붙잡고 기어오르며, 마침내 온통 자신으로 뒤덮어버리고야 마는 생명력이 좋다.


    오늘도 아침 산책을 나섰다. 눈을 뜨는 건 여전히 애씀을 요하지만 볕이 따가워지기 전에 나와야 이맘때만 머물다 사라지는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이 골목에서 만나는 아침은 독특한 냄새와 체온과 색채를 갖고 있다. 숙소에서 나와 조금 걷다 보면, 첫 번째 골목을 만난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그곳은 나의 산책이 시작되는 곳이다. 낯설지만 그리웠던 감각의 문을 다시 열으며 골목에 들어섰다.

 담장을 따라 골목을 걸었다. 마치 나의 정원인 듯, 골목의 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그 위에 작고 강한 아이들을 살핀다. 나는 바다가 보고 싶어 제주에 왔었다. 하지만 지난주에 이곳으로 숙소를 옮긴 뒤로는 바다보다 이 골목에서 덩굴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파도는 알지 못하는, 바다는 얘기해주지 않았던 어떤 이야기를 요 작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제주 바다에 대한 내 사랑이 식은 건 아니다. 그와 이어진 끈끈한 정은 언제나 내 마음 가장 소중한 자리에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음을 아는 제주의 푸른 바다가 사람들을 몽땅 끌어안고 있는 덕분에 나의 정원이 한적하니, 이 골목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보라색 풀꽃이 앉아 있는 코너를 돌았다. 나는 어제 이곳을 돌아서며 이별을 했다. 오래된 나무의 그늘을 덮은 돌담을 지날 때쯤 민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듣고 있던 노래를 바꾸려다가 전화를 받아버린 건 마치 그 전화를 받으러 이 골목을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길지 않았던 통화는 두꺼운 책의 뒤표지처럼 텁- 하고 이야기를 끝을 알렸다.

 보라색 풀꽃은 담장을 따라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어제는 눈물에 가리워 보질 못했구나. 이별이 슬퍼서 운 건 아니었다. 소중하게 여기던 이야기가 끝이 났는데도 마음에 아무런 기별이 없어서, 그 무덤덤함이 두려웠던 것 같다. "겁났구나." 그래, 맞아. 나는 겁이 났던 거야. 이 책을 처음 받아 들고 펼칠 때의 나는 한껏 들뜨고 흥분된 소녀였던 것 같은데, 이제 이 책을 다락방 책꽂이에 꽂아두어야 하는 나는 대체 누구였던 걸까?


    나는 바다 같은 아이라고 했다. 민재는 그렇게 나를 사랑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바다가 아니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배신하거나 변했거나 버린 게 아니어서, 바다였던 나를 사랑한 민재와 그런 민재의 바다였던 나의 이야기는 어제까지였다. 영화가 끝났다고 해서 감독도 배우도 관객도 서로에게 화내거나 미안해하지 않듯.

 그렇다고 해서 나는 우리의 이야기에 박수 칠 자신은 없어. 언젠가 다시 꺼내볼 용기도 아마 없을 거야. 이제 이 골목을 돌아나가면, 이제 나는 담쟁이덩굴이 되는 거야. 어떤 담장이라도 나의 정원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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