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의 기쁨이 있을까
아쉬운 마음에 칭찬의 꽃 피어지길
저의 학교에는 50여 평의 텃밭이 있다.
거기에 때를 따라 심어진 작물이 자라는 곳이다. 이 학교와 함께 기숙사가 있다. 이 기숙사에서 함께 살며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이 텃밭은 갖가지 작물을 재배하는 시범포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 배추, 무우, 돌산갓, 양배추, 꽃양배추(퀄리플라워), 토마토, 들깨와 상추를 심는다. 더하여 현지에 맞는 땅콩, 당근, 고구마도 심고 심지어 벼농사도 지어보다.
이번에도 얼마 전에 상추씨를 발아시켜 밭에 옮겨 심었다. 이 상추가 지금 거의 2주가 지났는데 살아있기는 하나 그대로다. 상추는 그동안 얼마나 물을 먹고 싶어 보챘을 텐데 말이다.
기숙사 학생인 지우에게 잘 돌보고 물도 잘 주라 했건만 잊어버렸나 보다. 오랜만에 만난 나를 보고 어쩔줄 몰라 한다. "그래, 알았다. 괜찮아. 이제 나라도 돌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주인은 농장의 작물이 잘 자라도록 종에게 책임을 주었건만 주인이 농장에 오지 않자 그 일을 잊어버린 종의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이 텃밭에 심긴 그 상추는 날마다 물을 바라지만 하늘의 이슬로 겨우 생명이 연명되어 있나 보다.
일군은 자기가 좋아하는 삶이 아닌 주인이 좋아하여 맡겨준 일에 마음을 둠이 우선이어야 한다.
믿고 맡겨준 일에 책임 있게 성실하게 내 일처럼 마음을 두는 자를 인정하고 칭찬하며 상을 주지 않겠는가.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동일하다 하겠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지명한 이가 맡겨준 역할을 누가 보나 안 보나 최선을 다하는 삶! 맡기는 이가 이후 칭찬과 상급을 주고자 한다. 더 많은 역할로 큰 기둥, 리더, 제자로 이끄는 그분의 손길이 예상된다. 우리에게 혹 한눈파는 모습은 없는가? 대강 하고자, 나의 호불호에 따라 별개로 분류하는 우리는 아닌가?
이분 아니 삼분법으로 나누고, 자신을 숨기는, 꿍꿍이가 있는 우리 아닌가?
아쉽다.
할 수 있으리라 여겨 맡긴 것인데,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보여주길 기대했는데,
잘 자란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잘 자란 상추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기대하였는데,
물도 있고, 시간도 주었고, 어떻게 하는 지도 가르쳐 주었는데,
맡겨 주었을 때, 잘하겠다고 대답도 했는데,
다른 선례를 이제까지 보여주고서 그대로 하라 했는데,
주인이, 아버지가, 사장님이, 상관이 바라는 의도대로 맡겨진 일을 하는 종, 아들 딸, 직원, 부하인지 자신을 돌아보면 어떨까 싶다.
아버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된다면,
대표님의 기대가 나의 기대가 된다면 소위 코드가 맞아 바라는 목표에 함께 이르리라.
그럼, 두 배의 기쁨에 이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