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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Nov 07. 2022

그리고 한강



한강은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 10여권 가까운 소설을 쓴 후 첫 시집은 2013년에야 나왔다. 시인 등단 이듬해 한강은 신춘문예 소설 부분에 응모해 동아일보와 서울신문에서 동시에 당선됐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단편 ‘붉은 닻’은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 맨 끝에 실렸다. <여수의 사랑>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은 각각 둘이다. 관찰하고 관찰되는 둘 사이의 이질적인 전개,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매한가지다. 그 둘들은 죄다 외롭고 고단하다.





한강이 쓴 시집의 표지가 변했다. 이유를 알 수 없다. 초판본 한강의 컷은 김선두가 그렸다. 한강의 얼굴과 시집 내용과 상관없어 보이는 재판본 표지가 낯설다. 한강의 시집은 지인의 선물이었다. 한강 읽기에 열을 내 읽고 있던 내가 기특하다 준 선물이었다. 2013년 연말 송년회겸 만난 자리, 지인은 이렇게 썼다. “무엇으로 끈질기게 들어가는, 또 그곳에서 알몸으로 뛰쳐나오는 성실한 몰입과 탈주를 존경하며, 한 해 마무리 포근히 하시길 빌며. 2013. 12. 7.” 밥벌이에 대한 고민이 깊던 시기였다. 





한강의 소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말수가 줄고 쪼개진다. 한강의 시는 소설이 쪼개져 더 이상 말로 그릴 수 없어 멈출 때마다 조금씩 꺼내 둔 것인지도 모른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 기억나는 시는 없다. (한강의) 소설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는 불가능한 안간힘이라면 시는 말 할 수 없는 것을 침묵으로 그린다. 소설과 시는 언어의 존재론적 층위가 다르다. 한강의 시는 그래서 무모하다. 





<소년이 온다>는 소설과 시가 어지럽게 겹쳐 있다. 소설과 시의 아슬한 이종교배, 산문을 잘 쓰는 시인이 있고 소설가도 있다. 나는 소설가의 산문보다 시인의 산문이 더 좋다. 김훈의 소설 속 단문은 시가 아니지만 한강의 소설 속 산문은 점점 시가 되어간다. 한강이 소설을 빌어 마주하려는 그 무엇은 쓸려야 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년이 온다>에는 시로 기억하고픈 구절이 많다. <소년이 온다>는 어쩌면 한강의 두 번째 시집이다. 80년 5월의 광주를 향한 초혼제, <소년이 온다>를 읽는 동안 향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산문으로는 불가능한 위로와 애도의 형식, 시가 되려는 산문의 안간힘은 거기서 비롯한다. <소년이 온다>는 내내 흐느낀다. 80년 5월 광주를 위한 진혼곡, 소년이 구슬프게 울었다. 소년은, 운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소년이 온다>, 134쪽)





책 뒷표지 안쪽에 까칠하게 이렇게 썼다. “한강, 난리가 났다. 상 하나 받았다고 책이 동나고 열풍이 부는 현상은 병증이 분명하다. 안개처럼 곧 사라질 쏠림, 한강도 떠나 보낼 때가 온 건지...”(16. 6. 19.) 너스레를 떤 게 분명하다. 열기가 가신 후 가을쯤 읽어야지 했다, 두 쪽 남았다. 상처입은 짐승은 틀어박혀 곡기를 끊는다. 한강 소설 <흰>은 형식도 내용도 이상하다. 생명에 대한 애도는 생명의 담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흰>은 겨우 마친 한강이 스스로를 위해 쓴 것 같다. 살풀이는 자칫 생명을 앗을 수도 있다. 스스로를 위한 또 한 번의 살풀이, 읽는 내내 앓는 소리가 들린다.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

난폭한 직선과 곡선들의 상처,

이를 악문 숫자들,

피냄새가 떠도는 침묵,

검게 젖은 어둠,

해쓱한 빛 속,

얼어서 곧은 손,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

결벽적일 만큼 윤리적인 태도,

수천수만의 반짝임,

수천수만의 뒤척임,

실낱처럼 가는 창백한 달,

찌르는 기쁨,

소리 없는 움직임,

부스러진 기억들,

파르스름한 연기,

거대하게 부푼 잿빛 날개 같은 연기,

침묵의 미미한 온기,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

푸르스름한 그늘...”



낯설게 단단한 단어들이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뜻 모를 소리, 구음(口音)은 언어가 아니다. 분명한 대상에 가 닿지 못한 말은 구천(九天)을 떠 돈다. 낮게 깔리는 구슬픔, 선명하고 담담해서 도리어 걱정이다. 한강이 다시 쓸 수 있을지, 쓸데없는 속 태움이면 좋겠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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