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흔적을 하나 둘 없애다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에 깼다. 유족 방에서 밤을 새우다 시피 부스럭 거리다 어느새 날은 밝아 왔다. 어제 까지 빽빽이 늘어서 있던 1호실 화환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싹 치워져 있었다. 화려했던 무도회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니 거짓말 처럼 마차가 호박으로 변하듯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유골함을 들고 오르는 아들의 어깨 넘어로 용미리 언덕이 바라 보이는 풍경은 상쾌 하기만 했다. 조용하고 탁 트인 언덕배기에서 누군가 삽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동그랗게 원형으로 된 구멍에 나는 유골을 털고는 흙을 덮어 발로 다지는 잔디장을 택한 것이다. 언젠가 그곳에 잔디가 자라고 비가 오고 바람 불고 해가 비추는 날이 반복 되면 정말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30년간 볼수 있다고 한다.
"수고했다'"
흙으로 돌려 보내는 과정이 끝나고 나서야 아들의 등을 토닥이고 친구의 팔을 만져 주며 말했다.
부목사와 전도사 그리고 사모 역시 내게로 와서는 "고생 하셨어요 " 하며 목례를 나누고는 비로소 홀가분 하다는 듯이 경쾌 하게 차를 몰고 사라졌다. 나는 마저 흔적을 지우겠다는 듯이 손에 들린 위패를 어떻게 처리 해야 하나 쓰레기통 주변을 두리번 거렸는데 이를 본 장의차 운전사가 내게 오더니 화장실 뒤칸으로 가서는 불을 붙이고 태우기 시작 했다 .
" 태워야 해요."
잠시 멍하니 그 연기가 가는 곳으로 사라져 가는 위패의 이름 석자를 보며 차에 올라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부친이 살던 집은 여전히 어질러져 있었다. 유품들을 정리하면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부친의 삶을 유추 할수 있었다. 통신 기술 하나로 중동으로 이민 갈 정도 였으니 그 기술이 집안 구석 구석에도 배어 있었고 다량의 비디오 테이프로 낙을 삼은 것을 알수 있었다. 너무나 많고 다양한 영양제가 쏟아져 나오면서 건강이 무척 안좋았음을 알게 되었고 임플란트 시술을 받고 있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기억이 점점 약해져 가면서 벽면에는 모친의 기일, 아들의 전화번호, 병원 예약일 등등 메모지가 덕지 덕지 붙어 있었다.
"90을 바라보는 노인에게 굳이 임플란트를 권하셨나요?'
새파랗게 젊은 치과의사는 직선적인 나의 질문에 좀 당황 한듯 했지만 이내 자료를 보이며 그동안의 치료 과정을 설명 하려 했다.
"어르신께 보호자를 데려 오라고 했는데 없다고 하시더 라구요. 의사 소통이 정확하지 않은듯 했지만 보호자가 없다고 하셧고 직접 트리 보다 임플란트를 하겠다고 하셨어요."
" 그래도 보호자를 데려 오라고 했어야죠 . 방금 의소통도 안된다고 하셨으면서 결국 병원이 하자는 대로 할수 밖에 없었을 것 같은데요? 천만원 가까이 되는것도 이해가 안가는 데요 ?."
"네 .... 아직 치료가 완료 된게 아니고..하지만 거의 마무리 단계 였거든요. 어쨌든 치료 중단에 따른 환불건은 제가 사무장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 진료가 있다며 자리를 피했다.
하나 하나 유품을 걸르며 정리하고 버리다 보니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결국 버려주는 업체를 찾기로 했다. 하루종일 인부 세명이 매달려 1톤차 네대 분량이 나왔다. 그러나 지금 부터가 시작이었다. 20여년을 살던 집이라 모든곳이 낡았고 모든것을 수리하고 고쳐야 사람이 살수 있었다. 최대한 견적을 많이 받아 보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천차만별 차이 나는 가격이 적정한지의 감도 잡게 되어 처음 보다 많은 예산을 아낄수 있었다 .하지만 매일 매일 열흘남짓 현장에 출퇴근 하다시피 오가는 통에 매여 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부친과 모친이 살던 '가족'의 흔적을 말끔히 지울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흔적은 지워도 기억은 지우지 못하니 이곳에 살면 옛 생각이 하나 둘 떠 오를것 같아 팔거나 임대를 놓기로 하였다 . 어느새 구정이 시작 되고 있었다.
* 글을 이어가면서 표현의 한계를 절감 합니다. 졸필을 회개 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