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하루는 도시의 그것보다 부지런하고 시작하고 이르게 마무리된다. 동이 터오기도 전에 시작되는 하루는 이슬처럼 맑지만 바닥에 떨어져 이슬에 젖은 나뭇잎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착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은석의 엄마는 아침 일찍 은숙이와 재봉이를 흔들어 깨운다. 은숙이는 재봉이 보다 네 살이 적지만 은석의 엄마는 재봉이보다 재숙이를 먼저 일으킨다. 재숙은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의 말을 귀에 담으려 애쓴다.
"재숙아, 오빠랑 은석이랑 밥 먹고 빈 그릇은 자싯물(개숫물)에 담가 둬. 남은 반찬은 솥 안에 넣고 솥뚜껑 꼭 덮어놔야 한다. 그리고 학교 갈 때 오빠가 뛴다고 같이 뛰지말고. 차 위험하니까. 알았지?"
은석의 엄마는 재봉이와 은석이에게 얼른 일어나라고 채근하면서도 재숙이에게 할 말이 많다.
"학교 끝나면 곧바로 집에 와서 은석이랑 같이 밥 찾아 먹고 같이 데리고 놀고. 엄마 말 알아들었어?"
"응, 알았어.." 재숙이 순하게 대답한다.
은석의 엄마는 아이들이 빨리 졸음을 물리고 일어날 수 있도록 아이들이 덮은 이불을 걷어 갠다. 대충 갠 이불을 한쪽으로 밀어 생긴 공간에 오봉 상을 들인다. 여전히 눈꺼풀에 졸음이 끼어있지만 아이들의 눈이 밥상을 훑는다. 아이들은 늘 고만고만하게 상에 오르는 푸른 잎새들에 시큰둥하다.
은석의 엄마는 재봉이에게도 당부를 한다. "재봉아, 밥 먹고 여기 도시락 꼭 챙겨가라. 학교에 너무 일찍 출발하지 말고. 동생 좀 잘 데리고 가고. 알았지?" 재봉이는 별 대답이 없다.
"엄마는 이제 일하러 간다!" 아이들이 숟가락을 드는 걸 보고 나서야 분주한 새벽을 일단락하는 엄마의 마지막 한마디다.
은석의 엄마는 이사 온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은수의 엄마를 따라 들녁으로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재숙이는 은수의 작은 누나 경애와 같은 2학년으로 등하교를 함께 할 친구가 생겨 학교 다니는 일이 여간 신나는 게 아니었다. 이사를 오면서 함께 학교에 갈 친구가 생겼다는 건 학교를 오가는 길에 더이상 오빠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이사오기 전 오빠와 둘이서만 학교를 다닐 때는 오빠의 심중을 살피느라 매우 고단했다. 육학년인 재봉이는 재숙이와 같이 발을 맞춰 걷다가도 문득 마구 뛰기도 하고, 늘 다니던 길이 아닌 곳으로 길을 들기도 했다. 재숙이가 미처 재봉이를 따라 잡지 못해 오빠를 놓치기라도 하면 재숙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떻게든 오빠를 찾아 따라잡으려 안간힘을 써야했다. 재숙이는 오빠가 뭐든 제멋대로 하려고해서 속상해 울음을 터트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엄마는 늘 재숙이에게 오빠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은석이 가만히 엄마에게 안긴다. 엄마는 은숙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혼자서 적적할 은석이 못내 가슴에 밟힌다.
"우리 은석이 착하지? 은석아, 밥 먹고 졸리면 더 자고, 심심하면 은수 오빠한테 가서 놀아.."
은석은 팔에 힘을 줘 엄마의 목을 꼭 끌어안는다.
"재봉이 엄마, 준비 다 됐어?" 은수의 엄마가 마당을 기웃거리며 묻는다.
"예, 나가요!" 은석의 엄마가 대답과 동시에 은석을 내려놓으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우리 은석이 착하지.."
서둘러 가는 엄마의 등 뒤에서 은석이 풀기 없는 무명처럼 주저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