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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와 은석의 이야기 18

은석이 이사가던 날

by 쿠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은수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든다. 친구들과 떠들고 장난치면서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은 굳이 버스를 타지 않아도 늘 짧게만 느껴졌는데.. 도대체 알 수 없는 기분의 실체가 무언지 몰라 은수는 자꾸만 조바심이 든다.


은수는 집에 거의 다다라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은석의 집이 텅 비어 있었다. 탱자나무 아래 한편에 있어야 할 은석이네 장독이 보이지 않았다. 늘 열려있던 사립문도 닫혀있다. 은수는 후다닥 뛰어 삽짝을 열고 은석의 집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어본다. 방문을 열었던 은수의 손이 툭 떨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할머니가 은석의 집으로 들어왔다.

"할미도 몰랐어.."

은수가 그대로 할머니 품에 안긴다. 등을 쓸어주고 머리를 쓰다듬는 할머니 품에서 은수의 어깨가 들썩인다.


은석이네는 갑자기 이사를 갔다. 아침에 은수가 학교를 가고 나서 트럭 한 대가 은석의 문 밖에 서기 두어 시간 전에야 은석이도 은석의 엄마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은석이의 엄마는 무언가에 홀린 듯 부랴부랴 짐을 쌌고, 트럭이 당도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은석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인사를 전했다. 할머니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은석이와 은석의 엄마를 바라봤지만 이내 이해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얼핏 집히는 게 있었다.


저 먼 동네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던 어느 날, 은석의 아버지는 어둠이 마지막 깊이를 더하는 새벽, 이슬과 함께 집에 들어왔다. 은석의 아버지는 이미 한 참이나 늦은 잠자리에 드는 대신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불이며, 베개며, 벽장과 옷이 든 반닫이까지. 부엌에선 씻어서 행주질된 그릇들이 젖혀졌고, 부엌 한편 쌓아둔 나뭇단과 아궁이 속 재까지 헤집어졌다. 그러나 은석의 아버지가 찾고자 했던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은석의 아버지는 들끓는 화를 참지 못해 씩씩거리며 이불속에 누웠지만 차마 잠이 오지 않았는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차마 잠들지 못한 은석의 엄마를 흔들어 앉히더니 은석의 엄마더러 입을 벌려보라고 했다. 은석의 엄마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입을 벌렸다. 은석의 아버지는 덥석 은석의 엄마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은석의 엄마 입 속에서 유난히 붉게 빛나는 금 이빨을 낚아챘다. 그 시간이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났는지 은석의 엄마는 아야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다. 은석의 엄마는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차 몰랐다.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있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한 건 은석의 아버지가 금이빨을 가지고 사라진 뒤였다. 은석의 엄마가 꺼이꺼이 울음을 울었다.


그날 은석의 아버지가 이리저리 온 집 안을 뒤집어 놓을 때 은수의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는 물론 탱자나무 울타리를 사이로 붙어있는 미화네와 황씨아저씨네 등등 그러니까 은수네와 오밀조밀 붙어있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어 가슴을 졸이며 은석이네 집의 낌새를 살피고 있었다. 은수의 할머니는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었다. 다행히 아무런 일 없이 은석의 집에 불이 꺼지고 마을이 다시 어둠에 잠겼다. 마을 사람들이 설핏 잠에 들었을 때 은석이 엄마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유독 쌀쌀한 봄의 새벽을 찢어놓았었다. 은수와 은수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은석이네가 이사를 가는 이유가 은석이 아버지의 노름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할머니는 더 묻지 않는 대신 은석이 엄마의 손을 잡았다. 며칠 사이 은석이 엄마의 얼굴이 티가 나게 부석부석하고 수척해 보였다. "은석이 에미야, 마음 단단히 먹고살거라. 내 니 마음이 어떨지 다 안다.. 이것들 아직 어린데.. 니도 불쌍하지만 니 없으면 이 어린것들 어찌하겠나.." 은석이 엄마가 고기를 숙이더니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은석의 아버지가 은석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수의 할머니가 치마를 들추더니 속고쟁이에 만들어 붙인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 세 장을 은석의 손에 쥐어주였다. 은석은 할머니에게 그리고 곧 있으면 학교에서 돌아올 은수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트럭에 안아 올려졌다.


은석은 바로 지난해 이맘때 탱자나무집으로 이사 올 때도 그랬지만 이사를 갈 때도 너무나 급작스러워 모든 게 혼란스럽게 여겨졌다. 은수는 할머니에게 그리고 학교에 있을 '오빠'에게 고맙다고.. 잘 있으라고.. 비록 말이 되어 나오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트럭 차창 밖으로 탱자나무 하얗고 뽀얀 꽃 향기 속에 은수의 할머니가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사진 출처 : https://search1.kakaocdn.net/argon/656x0_80_wr/4E9SHK9911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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