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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키 Nov 09. 2024

복자씨의 별사탕

은수와 은석의 이야기_12

은석이와 할머니는 은수가 학교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는 게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은석이와 할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온 은수에게 궁금한 게 너무나 많았고 은수는 학교를 오가면서 그리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아주 대단한 일인 양 신이 나서 늘어놓았다.


할머니는 은수가 선생님으로부터 지나가는 말로라도 칭찬을 받았다거나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낸 이야기를 들을라치면 "아이구, 내 새끼!" 하고 엉덩이를 토닥여주었고, 은석은 은수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찬바람이 마음속을 훑고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은수는 보란 듯이 책가방을 열고 책과 공책을 꺼내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은석은 은수가 으스댄다고 생각했다. 은석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편입된 은수와 달리 은석은 왠지 은수로부터 그리고 은수의 세계로부터 소외된 기분이 들어 쓸쓸해지곤 했다.


은수는 선생님이 네모칸이 쳐진 공책에 써준 '고은수' 이름 석자를 보며 똑같이 흉내 내듯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자를 알지 못하는 할머니는 은수가 저의 이름자를 써 내려가는 것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겼고, 마치 엄청난 지식이라도 얻은 것 마냥 자냥스럽게 생각했다.


할머니는 은수의 점심상을 보러 부엌으로 나가고 은석은 은수의 하는 모양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은수가 연필 끝에 침을 발라가며 또박또박 이름을 써나갔다.

'고'자를 쓰고 '은'자까지 썼을 때 은석이 말했다.

"오빠 너는 바보야? 학교 다니면서 이름도 못 써?"

은수는 은석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은석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여기.. '은'자 밑에.. 여기가 옆으로 뒤집어졌잖아.." 은석이 은수의 표정을 의아해하며 은수가 쓴 니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은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은석을 보았다.


은수가 갑자기 공책을 덮고 방을 나가버렸다. 은석은 은수가 갑자기 방을 나가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막연하게 은수에게 바보라고 해서 은수가 화가 난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할머니가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뛰어가는 은수의 뒤통수에 대고 밥 안 먹고 어디 가냐고 물었지만 은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은수는 은석이의 말을 떠올렸다. 은수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자신이 쓴 '은'자와 선생님이 공책에 써준 '은'자를 꼼꼼히 대조해 보았을때 은석의 말대로 'ㄴ' 은 옆으로 뒤집혀있었다. 은수는 화가 나는 한편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은석이가 글자를 알고 있었다구..?! 왜 나는 여태 그걸 몰랐을까.." 은수는 은석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보다 은석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자신이 몰랐다는 게 더 화가 났다. 은수는 골목길에 뒹구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은수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 학교에 가기 싫다던 은수에게 할머니가 해 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은수야, 네가 은석이랑 함께 놀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은석이를 생각하는 마음도 잘 안단다. 은석이가 이사오기 전에 혼자 놀던 네 마음이 어땠을지 할미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러나 은수야, 네가 은석이 보다 오빤데 오빠면 오빠답게 동생한테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란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은석이 한테 니가 배운 걸 갈켜주기도 하고, 은석이가 모르는 것도 알려주고. 그게 진짜 좋은 오빠가 아니겠니?"

은수는 할머니 말씀대로 은석에게 '진짜 좋은 오빠'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선생님 말씀을 잘 따랐고, 수업 시간에도 집중했다.


자음과 모음을 익히고 선생님이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각자의 이름을 공책에 적어주셨을 때 은수는 자신의 이름자를 보며 은석이도 자신과  똑같은 '은'자가 이름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해냈다. 은수는 그 사실을 은석에게 말해주고 싶었고, 글자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래서 은석이 보는 앞에서 정성껏 이름을 써 내려갔다. 은석이 글자를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은석은 언니 종숙이와 오빠 종석이 숙제를 하거나 공부를 할 때마다 늘 옆에 있었다. 엄마는 일하러 나가고, 언니랑 오빠가 학교에 가고 나면 은석은 아버지가 집안에 있든 없든 때로 심심했고 때로 적적했고 때로 무서웠다. 아버지는 은석을 귀여워했지만 낮시간의 대부분을 잠을 자는데 보냈고 잠을 자지 않을 때는 거의 신문을 읽거나 술을 마셨다. 은석은 혼자 있을 때 아버지를 흉내 내어 신문을 펼치고 신문 속 사진이나 그림, 만화 같은 걸 보면서 심심하거나 적적한 마음을 달랬고 무서움을 잊고자 했다. 그렇게 은석은 서당개처럼 조금씩 글자를 익혀갔다.


은석은 은수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오빠 너가 정말 바보라서 바보라고 한 게 아닌데.. ' 은수가 이렇게 화를 내듯이 자리를 피한 적이 있었던가.. 은석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은수가 자꾸만 자꾸만 은석이 모르는 어떤 사람이 되어 멀어져 갈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은석은 은수를 처음 보던 날 탱자나무 가시에 손끝이 찔렸을 때처럼 마음 한켠이 아리고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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