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학교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보았던 '미친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아이들은 아이들을 향해 말듯 모를듯한 이야기를 하는 미친년을 피해 도망쳤지만 어떤 아이들은 돌을 던졌다며 은수는 분개했다.
미친년은 이름이 고춘자라고 했고, 고춘자는 큰 키에 늘씬했으며, 얼굴도 갸름하니 밉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춘자는 햇볕과 바람에 오래도록 그을린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피부가 푸석푸석하니 거칠고 윤기가 없었다. 얼굴 여기저기에 올라오기 시작한 거무스름한 것들은 전체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고춘자의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고춘자의 나이를 들어 보이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고춘자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이 나갔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고춘자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마다 경우마다 조금씩 달랐다. 그럼에도 고춘자의 이야기에는 변치 않고 각색되지 않은 하나의 줄기가 있었으니,
고춘자는 매우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서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이지 고춘자는 대학교에서 만난 어떤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고춘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겠다고 했을 때 고춘자의 부모님은 근본 없고 보잘데 없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미래와 행복을 차버리는 철없는 고춘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고춘자는 남자의 학위와 성공을 위해 뒷바라지를 했고, 그 사이 아이도 하나 낳았다. 그러나 고춘자가 애써 지키고자 했던 사랑이라는 건 그리 대단하지도 강하지도 질기지도 믿을만한 것도 못되었는지 남자는 공부를 마치고 출세길에 나가게 되면서 다른 여자를 보았고, 고춘자는 아기도 빼앗긴 채 쫓겨났다. 그리고 어찌어찌하다 은수네 학교가 있는 동네까지 흘러들었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은수가 사는 동네는 물론이고 은수의 학교가 있는 면소재지에서조차 대학을, 그것도 서울에서, 여자가 학교를 다니는 경우를 보기는 매우 드물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만큼 똑똑하거나 혹은 부자였을 그녀는 한 남자로 인해 그녀 자신의 인생이 모양을 달리하게 될 줄 꿈에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장래가 촉망되었던 대학 시절,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렸지만 종내 정신을 놓아야 했던 여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할머니와 은석이는 은수가 물고와 하는 얘기를 듣는 걸 매우 좋아했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친구들과 무슨 놀이를 하며 어떤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지 선생님은 어떤 때 화를 내고, 어떤 때 칭찬을 하는지, 학교를 오가며 위험하지는 않은지 등등 마치 두 사람이 학교를 다니는 것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은수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당 밖에서 고물을 산다는 외침 소리가 들렸다. 달포마다 한번씩 생선이나 소금, 과일 같은걸 트럭에 싣고 오는 행상을 제외하면 고물이든 엿이든 혹은 여러 가지 방물을 파는 사람이든 은수네 마을까지 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우연찮게 들르는 장사꾼들은 대부분 은수네 동네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고 두 번 다시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물을 산다고 외치는 소리가 멎었는가 싶더니 트럭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은석은 은수를 따라 마당가로 나갔다. 은석은 발을 신발에 꿰면서 복실이를 불렀다. 아랫입술을 입안 쪽으로 최대한 당기고, 혀로 아랫입술 안 쪽을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찰진 소리를 내면 복실이는 엉덩이를 씰룩대며 나타날 게 뻔했다. 복실이는 은석이가 가는 곳이면 언제든 어디든 따라다녔고, 은석이가 은수에 집에 있는 한 복실이도 은수의 집에 있어야 옳았다. 그러나 복실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은수와 은석이는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가 뭐라도 얻어먹을까 할머니 곁을 맴돌고 있을지 모를 복실이를 불렀다. 복실이가 보이지 않았다. 은석이와 은수는 은수의 집은 물론 은석이의 집 안팎을 돌며 복실이를 부르고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복실이는 보이지 않았다.
풀 죽은 은석이 얼굴 위로 절망이 드리워졌다. 할머니도 합세하여 집 뒤를 돌아가는 또랑과 채마밭까지 찾아보았지만 복실이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은석이 고개를 떨구며 집으로 돌아갔다. 은수는 학교에서 돌아와 배가 고플 만도 했지만 이미 두어 번씩 돌아봤던 곳을 다시 돌아보며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허탕이었다.
할머니는 은수에게 함께 점심을 먹게 은석의 집에 가서 은석이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은수를 보내놓고 할머니는 은석에게 복실이가 필요했던 것처럼 누군가도 복실이가 필요해서 데려간 것 같다고 은석에게 말해줘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은석의 집은 조용했고, 은석이도 보이지 않았다. 은수는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에게 은석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그럴 리가 있느냐는 눈길로 은수를 바라보았다. 은수가 댓돌 위에 은석의 신발도 없었고, 혹시 몰라 방문도 열어봤지만 은석은 없었다는 말을 미처 맺기도 전에 할머니는 은석의 집으로 뛰어갔고, 은수도 덩달아 할머니를 쫓아 뛰었다. 은석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할머니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다.
할머니는 은석이 어려도 소견 빼기가 있는 아이니 아마도 고물장수가 복실이를 집어 갔을 거라는 걸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은수에게 윗뜸까지 얼른 뛰어갔다 오라고 했다. 윗뜸까지 가는 길은 하나의 길밖에 없었다. 중간중간 논으로 갈리지는 길이 있을 뿐이다.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윗뜸의 초입에 몇 백 년은 된 정자나무가 마을 문을 지키듯이 서 있다. 거기서부터 마을 쪽이 아닌 큰길을 따라 20분쯤 가면 신작로가 나온다. 정자나무아래에는 늙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장기도 두고, 막걸리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니 마을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했다. 만약 은석이가 복실이를 찾아간 거라면 그쪽으로 길을 잡았을 거고 그러면 분명 누구라도 은석을 봤을터였다.
은수가 헐레벌떡 땀까지 흘리며 돌아왔다. 은수는 정자나무 아래 김영감과 몇몇 노인들이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부터 앉아 있었지만 은석이 지나가는 건 보지 못했다더라는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전하면서 울음이 날 것 같았지만 꾹참았다.
할머니는 은석이 있을 만한 곳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은석이 고물장수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은석은 집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은수는 은석이 어디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언젠가 은석이 나비를 따라가다가 찾아낸 공간이었다. 탱자나무 가지가 울창한 나무줄기 아래 자세히 보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숨은 공간은 어린아이 두세 명이 붙어 앉으면 그만일 정도였다. 은수는 그 공간이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 무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은수에게 탱자나무는 아이들의 피를 빨아먹는 사악한 마녀의 손톱 같은 까시를 가진 무서운 존재였다. 은수가 어릴 때 어른들이 가시 가까이 가지 않길 바라서 들려준 이야기였지만 은수의 머리 깊숙한 곳에는 이미 탱자나무 가시가 두려움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은석이와 두어 번 들어가 본 적은 있지만 둘이서 소꿉을 늘어놓고 놀이를 하기에도 좁기도 했고, 아직 어렸던 은수와 은석은 늘 할머니 눈에 띄는 지근거리에 있어야 했기에 은수는 그 공간의 존재를 점점 잊어갔었다.
은수가 할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은수는 탱자나무 울타리 끝쪽으로 돌아가 탱자나무 사이 작은 공간으로 조심조심 고개를 숙여 얼굴을 들이밀었다. 은석이 제 키보다 조금 더 큰 공간에 신문지를 깔고 웅크린 채 누워있었다. 할머니가 은석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은석이 혼자서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에 눈물자국이 말라 붙어있었다. 은석은 은수의 눈에 마치 가시에 찔려 잠이 든 공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