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와 조력자살
어제 아침. 함께 근무하는 지인 A 씨의 반려묘가 수술을 받는 날이었다. 19년 된 노묘를 키우는 A 씨는 이른바 캣맘이다. 집으로 찾아온 길냥이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것이 벌써 3년. 한두 마리씩 늘어나 지금은 열다섯 마리의 길냥이에게 밥을 주고 있다고 한다. 호불호와 낯가림이 심한 성격 탓에 사람에게는 마음을 여는데는 오래 걸리지만(나와 친해지는 데는 3년 걸림) 고양이에게만큼은 무한 애정을 준다. 그런 A 씨를 보고 나는 우스갯소리로 “죽으면 고양이 천국으로 가. 분명 고양이들이 은인 대접해줄 거야.”라고 할 정도로 모든 고양이에게만큼은 지극 정성인 A 씨. 아마도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고양이이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런 지인에게 19년 된 노묘는 현재의 무너진 삶을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이가 많아 전신마취를 하는 수술이 걱정스러웠지만 필요한 수술이기에 날짜를 잡고 마음의 준비를 헸다고 했다. 사실 나는 결혼 전 친정에서 반려견을 키우긴 했지만 반려묘에 대해서는 그다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밤에 보면 유독 무서운 눈과 애처로운 아기 울음소리 같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왠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랄까. 호러물에 음침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고양이가 자주 등장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A 씨에게 매일같이 반려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샌가 나도 고양이가 비호감에서 호감인 동물이 되어 있었다. 특히나 A 씨가 이야기해주는 오래된 노묘와 길냥이들은 마치 내가 함께 키우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일을 해야 하니 병원이 문 열자마자 1 빠로 수술을 진행할 거라고 해 출근 후 만난 A 씨에게 고양이 안부를 물었다. 필시 무슨 일이 생겼다면 연락이 있었을 텐데 아무 연락이 없으니 최악의 상황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었다.
“OO이 수술은 잘 받았어?”
반려묘의 안부를 묻는 말에 지인이 울컥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OO이 얘긴 하지 마. 눈물 날 것 같으니까. 나 수업해야 하는데. “
가슴이 덜컥했다. 몇 년 전 기르던 반려묘 한 마리를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던 A 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마취에서 깨어나는 거 보고 온 거 아니었어?”
“OO이 수술 못 했어.”
“왜?”
“수술 전 간단한 검사를 했는데 다른 종양이 있어서 수술할 수가 없대.”
“…”
나는 얼른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양이나 개의 평균 수명은 15년 정도이다. 말 그대로 평균 수명이니 더 오래 사는 고양이가 있는가 하면 이보다 적게 사는 고양이도 있다. 평균을 기준으로 오래 살면 살만큼 산 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살 만큼 살았다고 해도 헤어짐이 서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신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이틀에 한 번 수액을 주사하고 흐르는 물만 먹는 탓에 새벽에도 반려묘가 물을 찾으면 일어나 물을 챙겨주는 지인의 정성으로 OO 이는 아픈 몸으로도 평균 수명을 넘겨 살아가고 있었다. 평소에도 올해만 넘겨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는데 그 작은 소망마저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A 씨만큼 나도 마음이 아팠다.
A 씨는 반려묘에게서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주식을 팔았다고 했다. 병원비 때문이었다. 반려동물의 치료비는 보험이 적용되지도 않을뿐더러 동물병원마다 차이가 있어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A 씨 역시 반려묘를 위한 적금을 따로 마련해 놓고 있었지만 벌써 몇 년째 반려묘가 아픈 데다 코로나로 수입이 줄어든 탓에 갑작스러운 지출을 감당하기가 부담스러울 수뿐이 없었다. 나는 그런 A 씨를 보며 ‘안락사’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수술로 종양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고 고통을 줄여주는 치료로 생명을 연장해야 할 텐데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이며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까라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 문득 ‘안락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없는 고양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고양이를 지켜봐야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인지.
종종 포털에서 입양 공고 기간이 지난 유기 동물들의 '안락사'이야기를 접하곤 한다. 단지 보호할 공간이 좁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삶의 주체인 동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안락사'가 결정되는 기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안락사>는 생존의 가능성이 아주 낮은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유기동물의 '안락사'에는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 외에 다른 명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조력자살>은 의료진으로부터 약물을 처방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로 이는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나 극심한 고통을 받는 불치병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해주는 안락사와는 다른 개념이다. '조력자살'은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중단한다는 의미가 더해진다.
아직은 ‘안락사’를 고민할 순간은 아니라는 A 씨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삶의 시작이 나의 의지가 아니었던 것처럼 자연적인 죽음 역시도 나의 의지대로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만일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유지할 수 있는 삶의 상황에 놓이고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만큼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