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오랫동안 남편의 생일상을 차렸다. 처음엔 나름 로망이었던 일이라 힘듬보단 즐거움이 컸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더운 날 음식 하며 고생하지 말라는 남편의 배려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나의 핑계가 만나 생일상 대신 외식을 하게 되었다. 물론 생일날 아침 간단히 미역국과 불고기를 해서 먹기는 했지만 생일상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한 한 끼였다. 그런데 올해는 남편의 생일이 주말인 데다 집밥을 먹는 식구들이 줄어든단 이유로 배달 음식을 많이 먹은 것이 맘에 걸려 집에서 해 먹기로 했다. 뭔가 새로운, 그동안 먹어보지 않은 메뉴를 해보고 싶어 며칠을 인터넷 검색에 투자했다. 남편 생일상, 남편 생일상 메뉴, 남편 생일상차림 등등. 검색으로 안 것은 첫째, 남편의 생일상이 시부모님 생일상보다 간결하다는 것(시부모님 생신상에는 왜 전이 꼭 들어갈까?)과 둘째, 메뉴가 거기서 거기라는 것. ^^ 결국 생일이나 기념일에 하는 우리 집 고정 레퍼토리 메뉴인 LA갈비와 잡채, 무쌈말이, 감자 샐러드를 하기로 했다. 문어숙회도 괜찮아 보이고 육전도 맛나 보였지만 어차피 해도 LA갈비에 밀릴 메뉴들이라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기회로 미뤘다.
남편 생일 전날 퇴근길에 LA 갈비를 사기 위해 집 근처 정육점에 들렸다.
“LA 갈비 있나요?”
“어.. 구워 드실 거요?”
“네.”
여자 사장님이 남자 사장님께 곤란한 듯 말씀하셨다.
“LA 갈비 구워 먹을 거 될라나?”
느낌이 싸했다. 설마?
남자 사장님이 물으셨다.
“몇 명이 드실 건데요.”
“3명이요.”
“LA 갈비가 8킬로 덩어리로 나와서 손질을 해야 해서..”
“네.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
“아니 그게.. 덩어리로만 팔아서 3명이 드시기엔 너무 많아요.”
“에? 덩어리로요?”
“요즘 그렇게 나오네요. 죄송해요.”
“아.. 네.”
안 판다니 돌아 나오긴 했는데 좀 기분이 이상했다. ‘동네에서 8킬로 덩어리를 사는 사람이 있나?’ ‘내가 자주 안 와서 안 파는 건가?’ 왠지 까인 듯한 기분. 하지만 그것보다 당면한 문제는 지금 LA 갈비를 어디서 사느냐는 것이었다. 주변을 돌아다니면 정육점이 몇 곳은 더 있었지만 가보지 않은 곳이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더군다나 뙤약볕이 내리쬐는 오후 3시였다.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기엔 나의 체력이 너무 저질이었다.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들이 오갔다. '밤에 남편 퇴근하면 코스트코를 가자고 할까?' '마을버스가 이마트까지 가니 이마트로 갈까?' '아래쪽에 새로 생긴 정육점에는 LA 갈비가 있으려나?' '새로 생긴 뉴타운 쪽에 정육점이 많던데 거긴 비싸려나?' 등등. 꼬여버린 일정에 머리가 복잡했다. 왠지 시작부터 불안하다. LA 갈비 구입부터 이렇게 꼬이다니.. 한참을 아파트 입구에 서서 고민하다 집 아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로 향했다. 그곳에도 없으면... 에라 모르겠다. 다행히 미국산 LA 꽃갈비가 있었다. 1.4킬로에 44900원. 역시 비쌌다. 밥상머리 물가가 올랐다는 뉴스는 봤지만 우리는 먹는 입이 줄어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외국산 고기에서 그걸 느끼다니. 온 김에 다음 날 병원 다녀오며 사려고 한 먹거리 재료들도 구입했다. 양손에 장 본 재료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산꼭대기 집으로 돌아오는데 잠깐 후회가 밀려왔다. 에이 나가서 사 먹자고 할걸.. ㅋ
다음 날 우여곡절 끝에 구입해 재워놓은 LA 갈비를 굽고 미역국을 한솥 끓이고 무쌈말이와 잡채, 감자 샐러드를 만들어 조촐한 저녁 생일상을 차렸다. 나름 효율적으로 한다고 했는데도 손이 느려 4시간이나 걸렸다. 도대체 이놈의 손은 언제 빨라지는 건지. 그래도 처음 음식을 할 때에 비하면 내가 느끼기에 음식하기가 훨씬 수월하게 느껴지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문득 친정 엄마가 생각이 났다. 엄마는 장사를 하고 들어와 새벽까지 할머니 생신상에 올라갈 음식을 혼자 준비하셨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는 엄마가 고생해 차린 생신상을 매서운 눈으로 훑으며 부족함이 없나 살피기만 했을 뿐 엄마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입만 달고 오는 아버지의 형제들과 그 자식들 모두 그러했다.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그 음식들이 좋아서, 함께 놀 사촌들이 오는 것이 좋아서 엄마의 그런 고생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가끔 아파트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쭈그려 앉아 음식을 하고 있는 그때의 엄마의 뒷모습이 떠오를 때면 뒷모습에 가려 보지 못했던 엄마의 얼굴이 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 마음이 아리곤 한다.
들인 정성에 비해 너무 단출한 생일상을 받은 남편은 고생했다면서도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고 덩달아 한 상 받은 딸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맛있게 갈비를 뜯어먹었다. 미각이 예민한 두 사람이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 역시 음식을 한 사람에게 가장 큰 보상은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 한 것이 없음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힘든 건 힘든 거.. 다음 생일은 외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