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를 읽고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하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베푸는 아찔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걸 확인하고 나면,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을 의심하게 된다. 사랑이란 이토록 연약하고 허망한 것인가. 사랑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견고한 힘이 되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랑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사랑을 속임수로 여기고 자신을 지키고자 한 것은 아닐까. 이승우의 소설 『사랑의 생애』에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눈다. 사랑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 사랑의 속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 사랑을 실천하는 주체인 사람을 불신하는 사람,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 나는 어느 쪽에 속할까?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쩌면 사랑을 가장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인물 영석이 선희의 ‘사랑한다고 말해줄래요’ 라는 요구에 ‘사랑해요’라고 말했을 때, 그 순간 말이 가진 주술의 힘으로 영석은 사랑하는 자가 된다. 고아원에서 자라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영석은 이제 ‘사랑이 자기를 믿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여린 짐승처럼 사랑이 떠나갈 까봐 끊임없이 사랑에 닿으려고 손을 내민다. 매 순간 사랑을 확인하려는 자의 손은 왕성한 넝쿨처럼 단단하고 집요하다. 넝쿨의 번식이 생존을 위한 것이듯 영석에게 사랑은 생존이다. 사랑하는 일이 곧 사는 일이며 사는 일이 곧 사랑하는 일이다. 영석은 사랑을 믿지 않는 자에서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자가 되었다. 이렇듯 사랑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결국 같다. 중간에 가로놓인 두려움만 극복한다면.
사랑에 대한 두려움은 사랑을 믿는 자로 가는 길을 방해한다. 선희가 먼저 손 내밀고 다가온 덕분에 영석은 두려움을 넘어 사랑을 믿는 자가 되었지만 형배는 자신이 느끼는 사랑이 사랑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사랑이라고 확신하며 가슴 떨리는 기분을 느꼈지만 나중에 보니 사랑이 아니라면! 그 당혹감을 어찌할 텐가. 형배는 다가오는 사랑에서 도피한다. 사랑을 느껴도 상대의 결점을 찾아내 사랑으로부터 도망간다. 그에게는 사랑을 위해 가정을 버린 아버지가 있었고 ‘사랑을 위한 아버지의 도피’는 형배에게 그림자를 남겼다. 사랑에 빠지면 위험한 것,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형배의 두려움은 카프카의 딜레마와 닮았다. 세 번 약혼하고 세 번 파혼한 카프카는 ‘사랑을 하지 못할까봐 불안해했지만 사랑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66p)
불안과 두려움 사이. 사랑하는 사람을 놓칠 것이라는 불안, 사랑하게 된다면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새로운 나를 만나고 미지의 나를 만나는 것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온 종일 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사건. 나 왜 이러지. 하고 스스로 묻게 되는 사건이다. 형배가 밤 열시에 선희에게 전화해서 느닷없이 파스타를 먹자는 제안이나, 신앙이 없는 준호가 민영을 위해 교회에 나가는 행동이 바로 ‘새로운 나’가 하는 행동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도무지 해명할 수 없는 그런 움직임이다. 소설에서 사랑은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선택당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숙주에, 사랑을 기생체에 비유하며, 숙주 안에서 기생체가 살아가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사랑이 살아간다고 한다. ‘어떤 생애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에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167p) 사랑의 생애가 각기 다른 이유는 사랑이 목숨을 이어가며 사는 곳, 사랑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의 생애』는 ‘개별적인’ 사랑의 각기 다른 생애’를 보여준다. 사랑에서 도피하는 자, 사랑을 구걸하는 자, 사랑을 채워주는 자, 사랑은 결혼 후에 시작된다고 믿는 자, 결혼에는 사랑이 없다고 믿는 자.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나의 사랑이 너에게는 사랑이 아니고 너의 사랑은 나에게 올가미이자 지옥이다. 사랑의 비극은 서로 다른 사랑의 정의에서 탄생한다. 다른 사랑을 하지만 ‘사랑’이라는 같은 말을 사용하는 난감함.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좁고 너무 넓다. 또한 너무 쉽고 너무 어렵다. 사랑의 모호함 때문에 사랑에도 통역이 필요하고 사랑의 오해가 낳은 비극의 역사가 그토록 오래도록 이어지는 지도 모른다. 오셀로의 비극이 아이고의 계략이 부른 오해에서 비롯되었던 것처럼. 그의 열등감이 불러온 불같은 질투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사랑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는 이유는 사랑의 불가항력 때문이다. 사랑에 공식이 존재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사랑 앞에서 속수무책이 된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몸을 가진 영석은 선희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연약함이 선희로 하여금 마음의 장벽을 낮추게 했다. 선희는 영석의 연약함에 반응했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강력한 손길을 느꼈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달려드는 영석의 등을 가만가만 두드려 주는 선희의 사랑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형배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형배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났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남편이 병들어 외로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곁에 있기 위해 찾아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선희와 어머니의 사랑은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선희는 사랑으로 삶을 확인하려는 영석의 내면 아이를 안쓰럽게 여겼고 어머니는 홀로 죽어가는 남편의 소식을 듣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모질게 먹은 마음이 무너졌다. 강함보다 연약함에 사람의 마음이 열린다. 나 역시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강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연약한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결혼을 위해서는 사랑보다는 큰 어떤 소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짧은 연애기간에도 결혼을 결정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혼 전부터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예감하면서도 할 수 있었던 건 그림자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남자를 구하겠다는 혹은 돕겠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내가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고 감당할 만큼 마음의 그릇이 넓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선희의 미래가 궁금했다.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을 향해 뛰어 들어갔는데 같이 빠져 버리는 형국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닌지. 아니면 함께 물에서 나올 수 있는지.
사랑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각기 다른 ‘사랑의 생애’가 존재하는 것처럼 ‘사랑 아닌 것이 사랑으로 가는 길이 된다. 강력한 것도 길이 되지만, 보잘 것 없는 것도 길이 된다.’(264p) 사랑으로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예상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사랑으로 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고, 사랑으로 가는 길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랑으로 가는 길일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의 생애가 탄생하는 신비로운 과정의 시작이 아닐까. 때로는 기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랑에 이르는 길.
『사랑의 생애』는 ‘사랑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그래서 ‘사랑이 대체 뭔예요?’라는 질문으로 끝난다. 작가는 소설을 현미경으로 탐구한 사랑에 대한 보고서라고 명명한다. 보고서는 끝내 사랑의 정의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지만 찾을 수 있는 하나의 정의가 있다면, 사랑을 정의할 수 없음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고,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285p)라는 문장은 사랑을 믿지 않는 자에게 남기는 따끔한 말이다. 소설이 사랑에 대한 탐구라면 탐구 다음에는 마땅히 실천이 따라야 한다. 관념적인 사랑의 탐구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285p) 소설이 던지는 사랑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앎에서 함으로의 이행이다. 소설은 말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