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헬스장에 갔을 때, 수많은 운동 기구들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사용법을 모르는 채 마주하는 운동 기구는 금속으로 된 차갑고 육중한 기계일 뿐이었다. 헬스장에서 울려 퍼지는 활기찬 음악은 어서 운동을 시작해 보세요,라고 등을 떠미는데 나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나마 익숙해 보이는 기구는 러닝머신. 시작 버튼과 속도 버튼만 작동시킬 줄 안다면, 러닝머신은 헬스장을 처음 이용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적의 기계였다. 러닝머신 위에서 속도를 올리며 몸을 데우는 유산소 운동이 모든 운동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중에 서야 알았다.
러닝머신에 있는 TV를 보면서 걸으면 시간이 금방 지난다. 혹은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하고 물건을 검색하고 주문하면서 걷는다. 운동을 제대로 했는지 헷갈리지만, 기계 판에 나타난 숫자가 얼마나 걸었는지, 칼로리를 얼마만큼 소모했는지, 운동량을 정확히 알려준다. 생각해 보면 걷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분주하게 떠올리느라 걷기에 몰두한 적이 많지 않다. 왜 그럴까. 러닝머신 위에 TV가 있는 이유는 한 곳에서 걷기가 꽤 지루하기 때문이 아닐까. 흥미롭게도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시시포스의 바위 굴리기 형벌이 러닝머신의 전신이라고 가정한다. 아무리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도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끝없는 형벌 말이다.
러닝머신 위를 걷거나 달리는 일이 시시포스의 형벌이라고 말하는 건 당혹스러운가? 미세먼지가 자욱한 날, 혹은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씨와 무관하게 실내에서 쾌적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반길만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걷기의 역사를 살피면 공간 이동보다 시간과 체력소모로 측정되는 러닝머신 걷기는 분명 도드라진다. 걷기라는 행위가 지닌 유구한 역사와 의미가 단순 반복적인 기계적 행동으로 축소되어서다.
걷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 철학의 시작이 있다. 소피스트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가르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걸어 다니면서 가르쳤다고 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소요학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장 자크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고 말했다. 칸트 역시 매일 정확한 시간에 맞춰 산책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니체에게도 산책은 중요했다. ‘나에게 세 가지 오락이 있으니, 첫째는 나의 쇼펜하우어, 둘째는 슈만의 음악, 마지막은 혼자만의 산책이다.’ (37쪽)
홀로 걷기는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사유 방식이었다. 숨쉬기처럼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걷기라는 행위가 지닌 위대한 씨앗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걷기는 모두가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아니었다. 걷기의 역사에서 여성들은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자유에서 소외되었다. 혼자 낯선 도시 거리를 걷는 여성이 지니는 함의는 대개 부정적이었으며 자신을 자발적으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였다. 결혼한 여성은 집에 있어야 한다는 통념이 여성을 걷기로부터 억압했다. 발터 벤야민이 집에 갇혀 지내야 했다면,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는 파리의 아케이드를 아무런 제약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주어진 재능이 똑같이 있는 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묻는다. ‘그녀가 술집에서 정찬을 시켜 먹거나 밤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었을까요?’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걷는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홀로 걷기가 사유의 방법이라면 함께 걷기는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방법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란히 걸으며 보폭을 맞추고 보행의 리듬을 탄다. ‘비포 트릴로지’로 불리는 비포 시리즈 영화에서 제시와 셀린이 생각난다. 세 편으로 완성된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그들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비엔나 거리를 밤새 걸으면서, <비포 선셋>에서는 파리 거리를 걸으면서,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그리스 거리를 걸으면서, 그렇게 그들은 함께 세상을 누비고 함께 있음을 누린다.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호흡을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우연한 만남과 경험이 만들어내는 드라마가 오직 그들만의 추억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거리라는 열린 공간이 얼마나 사적인 공간이 될 수 있는지! 제시와 셀린, 두 사람의 사랑의 역사는 거리에서 만들어졌다.
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 걸으면 걷기는 혁명이 된다. 전쟁에 반대하기 위한 거리 행렬, 부당한 상황에 맞서는 행진. 함께 걷기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거대한 물결이 된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는 아르헨티나 군사정부가 일으킨 전쟁 동안 실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만든 단체다. 1987년 아르헨티나에서는 정상화라는 외양 아래 유괴 사건들이 자행되었고 항의는 불가능했다. 교육받은 적이 거의 없고 정치적 경험도 없는 전업주부였던 여자들은 바로 자신들이 그 비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믿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의 5월 광장으로 갔다. 그들은 구타당하고 위협을 받으면서도 걷고 또 걸었다. 그들의 걷기는 행진이 되었고 역사가 되었다. 행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프간에서 여성들은 억압과 폭력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 거리에서 행진한다. 걸으면서 연대한다. ‘우리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 아이들을 위해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광장까지. 걷기의 역사는 직립 보행 인간, 호모 에렉투스의 역사다. 호모 에렉투스는 이제 러닝머신에서 걷는다. 러닝머신에서 걷기가 반복적인 기계 운동이라고 할지라도 시시포스의 형벌이라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 자발적인 바위 굴리기요 체력단련이므로. 공간 이동이 없는, 시간으로 환산되는 걷기. 얼마나 걸었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러닝머신의 세계. 둘이서 걷는 낭만도 함께 걷는 연대도 없지만 혼자 하는 생각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걷기에 대한 생각. 시작 버튼을 누른다. 속도를 올린다. 두 다리를 움직인다. 걷는다. 조금 빠르게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