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체를 단련하는 운동 중에 스쿼트가 있다. 양발을 어깨 넓이 보다 조금 넓게 벌리고 서서 발바닥을 바닥에 밀착한 채 등을 펴고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동작이다. 조금 더 구부리고 앉으면 수세식 화장실에서 용변 보는 자세가 된다. 올바른 운동 효과를 발휘하려면, 무릎이 아니라 고관절을 움직여야 한다. 골반과 허벅지를 이어주는 고관절을. 문의 경첩처럼 접었다가 펼 수 있도록 고관절을 중심으로 움직이면 다른 하체 부위가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인다. 무릎 힘으로 접었다가 폈다가는 엉뚱한데 힘이 실려 자칫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같은 동작도 어느 부위에 힘을 싣느냐에 따라 운동 효과가 달라진다는 것이 나는 종종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앉았다가 일어서는 단순한 동작에도 얼마나 많은 근육과 세포가 동원되는가!
몸은 편한 대로 움직이려는 관성이 있어서 집중하지 않으면 횟수만 채우고 끝나는 수가 있다. 운동하긴 했는데 잘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개인 운동 수업에서는 주로 자세를 점검받고 바르게 운동할 수 있도록 지도받는다. 무엇보다 한 동작에만 익숙해지지 않도록 새로운 자극을 얻는다. 혼자 운동했다면 익숙한 동작만 반복 하다가 시간만 채우고 만족감에 도취 되었을 나에게 선생님은 운동 강도를 높이도록 주문한다. 6kg 에서 10kg 으로. 양손으로 잡은 목 뒤에 얹은 역기의 무게가 묵직해진다. 누군가에게는 우스운 무게일지 모르나 맨몸으로 일어섰다가 앉았던 나에게는 그 차이를 ‘고통’이라고 밖에 달리 부를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근육은 고통과 불편함을 먹고 자라는 것인가?
혼자 운동을 즐기는 나의 친구는 일정한 무게가 익숙해지면 스스로 운동 강도를 높인다고 한다. 이전의 무게가 몸에 자극을 주지 않아서다. 운동을 얼마나 능숙하게 하는지 보려면 그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무게를 보면 될 일이다. 10kg, 15kg, 20kg, 25kg 한 단계씩 늘려가는 변화가 눈에 보이는 성장이자 성장이 주는 즐거움이다. 친구는 무게를 늘려나가는 재미에 매료되어 고통을 감수한다. 아마도 친구에게는 고통이 아닐 것이다. 눈에 보이는 변화를 위해 지불 해야 할 대가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친구는 한 마디 덧붙였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운동만큼은 내 마음대로 되잖아. 출산과 육아로 망가졌던 몸과 마음이 운동으로 회복된 친구는 운동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말을 시간과 땀을 흘린 노력만큼 몸이 보상해준다는 말로 해석했다. 그렇지. 그런 것 같아. 수치가 분명하게 보여주니까. 하지만 너의 몸이 특별히 운동을 잘 받는 몸이라서 효과가 잘 나타나는 것 같다고는 하지 않았다. 내 몸은 근육이 잘 안 생기던걸, 하는 말은 속으로 넣어두었다. 운동이 일상에 활력을 준다는 일반화에 나의 경우를 예외사항으로 제시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나 역시 노력한 만큼 보상해주는 운동의 정직성을 믿고 싶었기 때문에.
읽기 쓰기 근육이라는 말이 있다. 독서에 근육이라는 말을 조합해서 만든 ‘독서 근육’이라는 말을 누가 처음 고안했는지 모르지만, 읽고 쓰기도 반복을 통한 훈련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읽고 쓰기도 운동이다. 실제 운동과 비슷해서 운동 횟수와 무게를 늘리면서 근육을 키우듯 책의 양과 무게(깊이)를 더하면서 독서 근육을 늘린다. 독서 근육을 만드는데 필요한 책은 몇 권일까? 일 년에 150권 정도 3년 정도 읽으면 만들어질까? 책의 권수를 헤아릴 때 언제나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책의 내용에 따라 깊이가 달라서다. 얇은 책이지만 읽기 어려운 책이 있고 두껍더라도 휘리릭 읽어버릴 수 있는 책이 있다. 그렇더라도 절대적인 양은 중요하다. 책 읽기는 중력과 관성을 거스르는 일이라서 (‘오징어 게임’ 대신 책을, ‘당근 마켓’에 가는 대신 책을 선택하는 관성을 거스르려면, 얼마나 많은 근육이 요구되는가!) 채워야 하는 일정량이 있다. 책 없이 외출하면 불안해지는 증상이 나타나고 지갑, 핸드폰 다음에 책이 제3의 필수품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사태는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책 없이 살 수 없는 임계점.
이건 어디까지나 운동하기에 근거한 책 읽기에 대한 나의 생각이지만, ‘책 생활’에 이르는 길 중에 하나라고 믿는다. 임계점에 도달했다면 본격적인 근육 만들기를 시작한다. 근육을 고르게 만들기 위한, 새로운 부위 자극하기는 낯선 저자들의 책을 읽는 것이다. 내 몸의 잠들어 있던 부위를 깨워 새로운 자극을 느끼듯이 생소한 책을 읽을 때 나는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흥분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된다. 내가 몰랐던 나의 일부들을. 어쩌면 그러한 발견이 책 읽기의 고통을 이겨내고 얻는 전리품인지도 모른다.
일부러 고통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상하다. 좋아하고 재밌는 책도 다 읽을 시간이 부족한데 고통을 주는 책이라니. 요즘 나에게 고통을 준 책은 웬디 브라운의 『남성됨과 정치』다. 정치가 어떻게 남성화되었는지 기원을 살피고 정치철학 고전 독해를 보여주는 책이다. 한 문장, 한 페이지가 마치 무거운 역기를 드는 것 같다. 간절한 바람만으로 이해할 수 없고 무거운 역기를 들고 싶은 마음만으로 들 수가 없다. 부딪히며 부대끼며 겨우 이해되는 몇 개의 단어와 문장을 붙잡고 읽는다. 읽어갈 때 나의 이해가 맞는지 모르고 읽어간다. 올바르게 운동하고 있는지 확신 없이 운동하는 것처럼.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은(주디스 버틀러의 파트너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이상적인 체제로 보는 한나 아렌트는 공적 영역인 폴리스(정치)와 사적 영역인 오이코스 (가정)을 철저히 분리했다. 공적 영역은 정신으로, 사적 영역은 육체로 대변된다.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으로 침투하는 것을 우려했던 아렌트는 두 영역을 이분법적으로 보았는데 웬디 브라운이 볼 때 두 영역의 분리는 가능하지 않다. 아렌트는 행동을 강조한다. 행동이 정치적 표현이어서다. 그런데 어떻게 행동이 정신적으로만 가능한지 웬디 브라운은 묻는다. 행동에는 사고와 말뿐만이 아니라 육체가 필요한데 어떻게 육체 없는 행동이 가능한가?
이분법적 시선이 어떻게 정치를 남성됨으로 만들었는지 논의를 이어간다. 전체 논의와 별개로 나는 육체와 정신에 대한 두 이론가의 시선에 주목하고 싶다. 정치적 언어로서의 육체와 정신은 어떻게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지금 시도하는 독서라는 정신적 활동이 사실은 육체의 활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쳐주고 연결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내가 들 수 있는 무게는 그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천천히 들어 올리듯 읽어나가면 페이지의 무게가 조금 가볍게 느껴질까. 이 무거운 책을 덮고 나면 근육이 미세하게 자라서 다른 책을 조금 가뿐하게 읽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는 쾌락독서도 있지만, 페이지가 무겁게 넘어가는 고락독서도 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는 독서. 나는 괴로움을 바란적이 없지만, 가장 큰 즐거움은 언제나 괴로움 뒤에 있었던 것 같다. 무게를 한 단계 올릴 때 근세포가 찢어지고 그 자리에 새살이 돋듯, 새로운 근세포가 생겨 근육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먼저 찢어져야 한다. 찢어지는 시간이 부디 많이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반복하다보면 어느덧 근육이 자라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