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이마시고 내쉬고. 몇 년 전, 필라테스 수업에서 가장 공들여 배운 것은 호흡이었다. 6개월 남짓한 수업에서 한 일개월 가량 호흡에만 집중했는데, 들이마실 때 배 안에 커다란 공간을 만든다는 느낌으로 부풀리고, 내 쉴 때는 뱃가죽과 등가죽이 만난다는 느낌으로 깊게 내쉬면서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숨 쉬는 것도 운동'이라는 말을 깊게 체험했다고 할까.
호흡이라는 기초를 잘 세워두어야 그 이후 동작을 얹을 때, 엉키지 않고 할 수 있다. 가령, 들이마실 때 몸이 내려가고 내 쉴 때 몸을 일으킨다. 힘을 써서 중력에 저항할 때 숨을 후 내쉰다. 초반에 동작 따로 호흡 따로 스텝이 엉키면서 마냥 꼬이는데 하다 보면 힘이 바짝 들어가는 동작을 할 때 대부분 내쉬게 되는, 일반적인 규칙을 발견하게 된다. 몸에 규칙을 익히면 비로소 호흡과 동작이 일치하면서 편해진다.(고 한다. 사실, 편해짐을 드물게 경험하는 이유는 머리로는 잘 알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편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운동을 쉬면 다시 호흡과 동작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잊는 건 한 순간이라는 말은 운동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보통 의식하면서 숨쉬지 않는다. 불편이 엄습할 때 비로소 숨 쉰다고 인식한다. 숨쉬기 편하다, 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얼마나 숨쉬기 불편했는가를 말해주니까. 마스크가 일상화된 생활에서 운동할 때도 예외 없이 마스크를 쓴다. 들이마신 공기는 더운 공기가 되어 몸에서 나오는데 마스크 안에 더운 숨이 그대로 머물러 있다. 데워진 숨을 다시 들이마시고 더 더운 공기가 몸에서 배출된다. 오염된 공기를 반복적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사태. 호흡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호흡을 의식하게 되는 독서가 있다. 숨을 쉬기는 쉬는데 제대로 된 호흡을 하고 있는지 자꾸만 확인하게 되는 운동처럼, 내가 대체 무엇을 읽고 있는지 묻게 되는 독서. 한나 아렌트가 쓴 『발터 벤야민』은 백 페이지가 조금 넘는 포켓 사이즈의 얇은 책이다. 발터 벤야민의 「조명」에 아렌트가 서문을 썼고 그 서문이 책이 되어 나왔다. 원래는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의 한 장으로 실렸던 내용인데 따로 독립되어 『발터 벤야민』으로 나온 것이다.
아렌트는 벤야민의 은유적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시를 쓴 아렌트가 벤야민의 은유적 사고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는 아렌트와 벤야민 사이 영향 관계를 알고 싶었지만 『발터 벤야민』이 직접적인 힌트를 주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삶과 사유에 관한 아렌트의 해석이다. 아렌트를 우회해서 벤야민을 읽을 수 있다. 호흡이 턱턱 막히듯, 문장과 문장 사이를 건너지 못해 읽기의 흐름이 끊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호흡이다. 이 책을 읽는 다른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무리 없이 호흡하면서 읽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호흡이 빨라서 숨가쁘게 읽게 되는 책이 있다. 김훈은 『칼의 노래』를 쓸 때 휘모리장단을 염두에 두었다고 밝혔는데, 휘모리 장단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휘몰아 가는 가장 빠르고 거친 장단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쓴 소설 『칼의 노래』는 하루하루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 전쟁 속에서 치열하게 기록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그려진다. 자신의 사지(죽을 곳)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전략을 짜고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지만 담담하다. 임진왜란으로 발생한 죽음, 가난, 추위, 아픔이 당시의 일상이었다. ‘삶이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쉽게 망각 되는 진실을 그는 똑바로 응시한다. 이순신의 목소리로 전하는 김훈의 말에 군더더기가 없다.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오는 적보다 가는 적이 더 무서웠다. 적은 철수함으로써 세상의 무의미를 내 눈앞에서 완성해 보이려는 듯 했다.
김훈에게 장단을 조절하는 수단은 무엇이었을까. 김훈은 글을 쓰는 일이 ‘은,는,이,가’ 한 음절짜리 몇 개 안되는 조사를 가지고 살림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글을 읽고 쓰는 일은 결국 조사를 운용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니 읽기와 쓰기의 호흡은 조사에 달렸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이전에는 ‘꽃은 피었다’로 썼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꽃이 피었다’ 와 ‘꽃은 피었다’가 천지 차이라고 말하는 작가, 김훈. 주관적 정서를 담은 ‘꽃은 피었다’가 아닌 ‘꽃이 피었다’는 물리적 사실을 담은 객관적 진술을 쓰고자 했다. 조사 하나로 완전히 세계가 달라진다는 것을 명징하게 의식하며 김훈은 쓴다. 『칼의 노래』는 휘모리 장단으로 거칠고 빠르게 나아가지만 그는 ‘은, 는, 이, 가’가 만들어내는 세계를 섬세하게 판별하며 괴롭게 한 자 한 자 쓰지 않았을까.
쓰기와 읽기의 호흡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장단은 리듬이고 리듬은 호흡을 결정한다. 책에 따라 호흡이 다르고 다른 호흡이 다른 읽기를 만들어낸다. 호흡을 의식하게 하는 독서는 어렵고 피곤하다. 숨 차는 운동이 어렵듯이. 그런데 나는 왜 마스크를 쓰고 더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운동을 하고, 흐름이 막히는 독서를 하는 걸까. 역설적으로 그러한 숨막힘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어서다. 살아있다는 증거는 왜 필요한가. 죽어있는 삶을 깨우기 위해서다.
운동에서 호흡을 공들여 배운다는 것은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호흡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읽기와 쓰기 운동에서 호흡을 배운다. 어디에서 쉴 것인가 얼마나 쉴 것인가. 작가의 문장이 마음 속 파문을 일으킬 때, 나는 기꺼이 그 파문을 응시하며 의미를 알아내느라 골몰한다. 아마도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을 멈춤인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문장 또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파문이 될 수 있을까. 유의미한 침묵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갑자기 숨이 가빠진다. 너무 멀리 보지 말고 지금 여기를 보며 호흡을 가다듬어야지. 호흡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할 수 있다면, 읽기와 쓰기 운동이 얼마나 달라질까. 들이마시고 내쉬고.